ADVERTISEMENT

[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신영균 신성일 김지미…65년 납세 톱30 중 연예인 20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지난해 12월 말 열린 원로영화인 송년 모임. 배우 신영균과 방송인 송해가 특별공로패를 받았다. 맨 왼쪽은 이해룡 원로영화인회장. 김경희 기자

지난해 12월 말 열린 원로영화인 송년 모임. 배우 신영균과 방송인 송해가 특별공로패를 받았다. 맨 왼쪽은 이해룡 원로영화인회장. 김경희 기자

“셋집에 살던 배우들이 집을 사고 또 자가용을 마련하고 이젠 납세액 최고를 자랑하는 국민이 됐다. 65년 30명의 개인 고액 납세자 가운데 낀 20명의 연예인이 전국 총액의 5.8%를 냈다니 한 사람이 평균 6만 명 몫을 낸 셈이다.”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64) #<35> 스타와 세금 #69년 1위 올라, 가수 1위의 7배 #72년엔 국세청 홍보영화도 찍어 #최은희와 분식점 차려 주변 도와 #가난한 영화인 자녀에 장학금도

1966년 8월 신문 기사의 한 대목이다. 65년 국세청 납세 현황에 따르면 나와 신성일·김지미가 약 200만원을 냈고, 김진규·엄앵란이 100만원, 그 밖에도 50만원가량을 낸 스타들이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연예인들의 세금 납부는 좋은 기삿거리가 된다.

67년 국세청 모범납세자 표창 받아

69년 내가 연예계 고액납세자 1위에 올랐다. 국세청이 배우·가수별로 고액납세자 톱10을 발표했는데 내가 476만6000원으로 가수 1위 김상희(63만3000원)의 7배가 넘었다. 2위는 박노식(447만원), 3위는 문희(332만2000원)였다. 이어 김지미(310만9000원), 신성일(300만7000원), 구봉서(238만9000원), 남정임(232만3000원), 윤정희(202만1000원), 허장강(134만7000원), 서영춘(120만9000원) 순이었다.

배우들이 돈을 쉽게 번 것은 아니다. “기계만도 못한 게 배우 생활”(엄앵란)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문희)이라는 증언이 잇따를 만큼 무리한 일정을 소화했다. 한 해 평균 20~30편, 많게는 50편씩 찍었다. 집에서 편하게 자는 날이 드물었다. 제작자 입장에선 하루라도 빨리 끝나야 돈을 아낄 수 있다 보니 재촉이 심했다.

1960년대 납세 1위를 다툰 신영균과 신성일. [중앙포토]

1960년대 납세 1위를 다툰 신영균과 신성일. [중앙포토]

지나친 과세에 대한 배우들의 불만도 일부 터졌다. 예컨대 김승호는 60년대 중반 공항 직원에게 호통을 치다가 구설에 올랐다. 어느 고관의 비행장 내 입장은 허락하면서 막상 자신은 막히자 “고액 세금을 내는 애국민을 푸대접하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단지 스타라고 유세를 떤 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67년 상반기 자료를 보면 신성일의 소득은 645만원, 세금은 195만7000원이었다. 세금이 소득의 30.3%에 달했다.

나는 배우들을 대표해 과세 완화를 요청하기도 했다. 67년 3월 배우·성우·변호사 등 자영업자들의 소득표준 재조정에 관한 공청회에서다. 당시 제작자들은 20일 내지 2개월짜리 연수표로 출연료를 지급하곤 했는데 영화가 실패하면 자금난으로 부도수표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세무서에서 이런 점을 인정해주지 않아 이중과세가 되는 실정을 지적했다.

물론 납세의 의무는 늘 충실히 지켰다. 67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세금의 날 기념식 때 엄앵란과 함께 모범납세자 표창을 받았다. 72년 ‘신영균씨의 어느 날’이라는 10분짜리 홍보 영화를 찍기도 했다.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내가 빨간색 쿠가 차를 몰고 영화 촬영장에 도착한다. 촬영하는데 웬일인지 자꾸 NG가 난다. 지난해보다 세금이 20%나 많이 나와 기분이 안 좋았던 것. 감독의 양해를 얻어 고지서를 들고 국세 상담소를 방문한다. 금년도 세정 전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듣고 납득하게 된다.

71년은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첫발을 내딛는 해로, 세정 목표는 ‘총화세정’이었다. 총화세정이란 관민의 협동정신과 공평한 과세, 성실한 납세를 의미한다. 개인과 기업이 이윤의 몇 %를 세금으로 내는 것은 세계 공통이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지난 10년 동안 1·2차 경제개발, 고속도로 완성 등 국가 발전을 이루었기에 앞으로도 성실한 납세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우리가 낸 세금은 산업자원이 돼 우리에게 돌아오므로 다 같이 세금을 잘 내자”고 호소한다.

“세금은 정부와 동업하는 것” 믿어

2020년 상반기 예술인자녀 장학금 수여식. [신영균예술문화재단]

2020년 상반기 예술인자녀 장학금 수여식.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정부의 협조 요청으로 찍은 영상이지만 사실 납세에 대한 내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배우 시절뿐 아니라 명보제과·명보극장·신스볼링·한국맥도날드 등을 운영하면서 세금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불만이 전혀 없을 순 없지만 정부와 동업을 한다는 생각에서 세금을 냈다. 아깝다고 여기면 사업을 키워갈 수 없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퇴역 영화인을 생각하면 세금 고민도 사치에 불과할 것이다. 69년에는 동료 배우들과 불우한 영화인들을 돕기 위해 충무로에 분식집을 차리기도 했다. 분식점 이름은 60년대 한국 공포영화의 대명사인 ‘월하의 공동묘지’(1967)에서 딴 ‘월하의 집’이었다. 개업 첫날부터 손님이 밀려들었다. 나와 최은희씨가 종일 서빙을 해서 라면 680그릇을 팔았다. 당번을 정해 못 나오는 배우에게는 벌금 1만원을 받았다.

여담이지만 당시 후원이 좀 필요해서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을 찾아가 만났다. 63년 서민의 배고픔을 덜고자 한국 최초의 라면, 삼양라면을 출시한 분이다. “실은 내가 일본에서 영화 촬영을 하다가 라면을 처음 맛보고 한국에서 사업을 하면 잘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영화 일에 바쁘다 보니 삼양에 선수를 뺏겼다”며 “그러니 영화계 후원에도 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전 회장이 껄껄 웃으며 흔쾌히 후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2010년부터 사재를 기부해 설립한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을 통해 어려움에 부닥친 영화인과 자녀들을 돕고 있다. 60~70년대 단역 배우나 스태프 위주로 구성된 ‘영화인원로회’를 격려하는 뜻에서 매년 말 송년 모임도 열어왔다. 세금을 꼬박꼬박 내더라도 우리의 손길이 직접 닿아야 하는 곳은 여전히 많다. 후배 배우들도 ‘월하의 집’ 정신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