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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트럼프 국가비상사태 선포, 증시는 살렸지만 사재기 광풍 불렀다

중앙일보

입력

미국 시카고의 한 대형마트에서 14일(현지시간) 한 고객이 청소용품을 보고 있다. 화장지와 페이퍼타올이 있던 판매대는 텅 비어있다. [AP=연합뉴스]

미국 시카고의 한 대형마트에서 14일(현지시간) 한 고객이 청소용품을 보고 있다. 화장지와 페이퍼타올이 있던 판매대는 텅 비어있다. [AP=연합뉴스]

지난 13일 오후 3시 29분(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로즈가든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에 섰다. 뉴욕 증시 폐장을 30분 남겨둔 때였다. 준비해 온 회견문을 읽어내려가던 트럼프 대통령 입에서 "오늘 나는 공식적으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다"는 말이 나왔다.

뉴욕증시 폐장 30분 전 국가비상사태 선포 #9%대 상승하며 '검은 월요일'주 최악 피해 #월가는 환영, 국민은 공포감에 '싹쓸이' 쇼핑 #전국 동시다발, 허리케인과는 다른 불안감

3시 35분. 이때부터 뉴욕 증시는 가파르게 솟구쳤다.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는 전날보다 9.36%(1985포인트) 오르며 거래를 마쳤다. 2008년 이후 하루 상승 폭으로는 최대였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지수는 9.29%(230.38포인트), 나스닥지수는 9.35%(673.07포인트) 상승했다.

다우지수는 지난 9일 7.79% 떨어진 데 이어 전날 9.99% 하락하면서 1987년 '검은 월요일' 이후 가장 큰 하락 폭을 기록했다. 최악의 한 주를 마감하기 직전 날개 없는 추락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을 덜어주는 데 국가비상사태 선포가 한몫했다고 본다. 이 조치로 연방 기금 500억 달러(약 6조원)를 풀어 코로나19 대처에 사용할 수 있게 됐다. CNN은 트럼프가 '기자회견을 열었더니 증시 역사상 최고의 날이 됐다'는 메시지와 함께 자필로 서명한 다우지수 급상승 차트를 지지자들에게 돌렸다고 전했다.

하지만 월가 투자자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한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일반 미국인들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미국 내 코로나19 확산이 예상보다 빠르고, 광범위하고, 심각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읽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한 대형마트 신선식품 판매대가 14일(현지시간) 코로나19 확산에 공포를 느낀 쇼핑객들이 싹쓸이 쇼핑을 하면서 텅 비었다. [AP=연합뉴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한 대형마트 신선식품 판매대가 14일(현지시간) 코로나19 확산에 공포를 느낀 쇼핑객들이 싹쓸이 쇼핑을 하면서 텅 비었다. [AP=연합뉴스]

이날 밤 워싱턴 시내 한 대형마트로 장을 보러 갔다가 그 공포감을 생생하게 봤다. 싹쓸이 쇼핑으로 판매대 곳곳이 텅 비어있었다. 화장지와 손 세정제, 항균 물티슈, 생수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채소·과일·육류·계란 등 신선식품 판매대도, 장기간 보관하기 좋은 냉동식품 판매대도 휑했다.

참치 캔과 깡통 수프, 파스타 판매대에서 한두개 남은 상품을 겨우 발견해 바구니에 담으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만약 자가 격리나 재택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오래 버티기 어려운 분량이었다.

주말인 14일 '패닉 쇼핑' 현상은 전국에서 목격됐다. 이날 뉴욕의 대형마트 코스트코는 입장을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고, 차량 행렬이 수 ㎞ 이어졌지만 정작 매장 안 선반은 비어있었다고 폭스뉴스는 전했다. 이날 샌프란시스코 슈퍼마켓 트레이더 조는 대기 줄이 세 블록 넘게 이어졌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일부 매장에서는 1인당 구매 개수에 제한을 뒀지만, 폭증하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다. WSJ은 "식품 기업들이 수요 증가를 예상하고 대비했지만, 증가 폭과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14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의 한 대형마트 빵 판매대가 거의 비었다. [연합뉴스]

14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의 한 대형마트 빵 판매대가 거의 비었다. [연합뉴스]

트위터에는 텅 빈 판매대, 물건을 놓고 싸우는 쇼핑객, 상식을 벗어난 양을 구매하는 사진과 함께 #공포의 사재기(panicbuying) #코로나종말(coronapocalypse) 같은 해시태그 달기가 유행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미 유통업체들은 고객들의 사재기 현상에는 익숙한 편이다. 대형 허리케인이나 폭설 같은 자연재해에 대비해 일정 기간 생활할 수 있도록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비축하는 일이 미국인들에게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는 자연재해와는 완전히 달랐고 패닉은 커지고 있다. 허리케인이나 폭설은 일부 지역에 국한되지만 코로나19는 미 전역에서 동시다발로 퍼지고 있다.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다는 데서 공포심은 더욱 커진다.

14일(현지시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사는 60대 여성이 화장지와 티슈, 청소용품, 생수 등을 가득 실은 카트를 밀고 집으로 가고 있다. [AP=연합뉴스]

14일(현지시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사는 60대 여성이 화장지와 티슈, 청소용품, 생수 등을 가득 실은 카트를 밀고 집으로 가고 있다. [AP=연합뉴스]

미 보건당국이 권고한 코로나19 예방법을 따르기 위해서는 비누와 손 세정제, 항균성 세정제와 화장지 등이 필요하기 때문에 쇼핑객을 비판할 수만은 없다. 미 언론은 어떤 품목을 비축하는 게 좋은지 '사재기 목록'을 생활 정보 기사로 내보내고 있다.

14일 백악관 언론 브리핑에서 "사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미국인들이 물건을 많이 비축해야 하는 상황이냐"는 질문을 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답했다. 문제는 공급 부족이 이른 시일 안에 해소되기 어려우면서 사회적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점이다.

전날 트럼프 대통령은 더그 맥밀런 월마트 최고경영자(CEO)에게 상품을 공급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맥밀런 CEO는 "손 세정제와 화장지, 청소용품을 계속 채워 넣고 있지만, 바로바로 팔리기 때문에 앞으로 상당 기간 원활하게 공급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존스홉킨스대는 15일 오후 4시(한국시간) 현재 미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49개 주와 수도 워싱턴,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서 2952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지난 1월 21일 미국에서 첫 확진자가 나온 이후 50여일 만에 웨스트버지니아주 한 곳을 제외한 미국 전역으로 퍼졌다. 사망자는 57명이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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