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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세계 경제 전망

미국 제조업의 탈중국 속도 더욱 빨라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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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코로나19’가 촉발한 글로벌 공급사슬 재편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중국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제조업의 글로벌 공급사슬(GSC, global supply chain)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동안 전 세계 다국적 기업은 예외 없이 중국에 진출해 제품을 생산하거나 중국 기업에 중간재를 수출하는 방식으로 성장해 왔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중국 시장 의존도가 높을수록 기업 경영 리스크도 커진다는 점을 생생히 보여줬다.

지역 편중 높을수록 역병 위험 증폭 #미국 애플도 중국 의존도 높아 휘청 #공급망 다변화·리쇼어링 속도 내고 #핵심 기술은 국내에 꼭 쥐고 있어야

그동안 세계 주요국은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하면서 자국 기업 우대와 외국기업에 대한 기술탈취 같은 불공정 행위를 일삼아도 마땅한 제어 장치가 없어 전전긍긍했다. 중국의 횡포를 감수하면서도 인구 14억 명의 거대 시장을 포기할 수 없는 ‘차이나 딜레마’였다. 특히 2008년 미국이 글로벌 금융위기로 휘청하면서 중국은 본격적으로 발톱을 드러냈다. 나아가 2013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몽(中國夢)과 함께 일대일로(一帶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구축을 앞세워 2049년에는 군사력에서도 중국이 세계 최고가 된다는 목표를 세우면서 미·중 패권 전쟁이 본격화했다.

미국은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중국 견제의 칼을 뽑아 들었다. 대다수 미국인과 미 의회는 초당적으로 이 정책 기조에 찬성하고 있다. 미국의 이런 기류는 허드슨연구소의 마이클 필스버리(M. Pillsbury) 중국전략센터 소장이 2015년 펴낸 『백년의 마라톤』에 잘 녹아 있다. 이 책 첫 장은 손자병법의 위계(爲計, 속임수)부터 다룬다. 한마디로 “미국은 그동안 중국에 속아왔다”는 주장이다. 미국은 중국이 미국 주도의 세계 무역 질서에 순응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덩치 큰 경제를 앞세워 패권 추구에 나서자 중국의 독주를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이나 딜레마’ 증폭

한국과 미국의 유턴기업수

한국과 미국의 유턴기업수

이런 기조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3월 중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 폭탄을 무기로 무역전쟁을 일으켰다.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글로벌 공급사슬의 차단에 나선 것이다. 뉴욕타임스(NYT)는 “미 정부가 5세대(5G) 이동통신 장비 세계 1위 업체 화웨이 봉쇄에 나선 것은 기술패권 때문”이라고 봤다. 인공지능(AI)을 비롯한 첨단 기술 시대의 주도권을 놓치면 경제는 물론 군사력에서도 미국의 입지가 흔들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지난 2년간 손에 잡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세계 경제가 ‘세계의 공장’이 돼 버린 중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사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오히려 일대일로를 내세워 독일에 철도를 연결하고 이탈리아에 항만 건설권을 따내며 미국의 아성을 허물어 왔다. 영국조차 트럼프의 강력한 요청을 뿌리치고 화웨이의 5G 장비를 사용하기로 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핵심 부품을 배제했지만 주변 부품 사용이 늘어날수록 화웨이에 의한 기술 종속 우려가 커지는 것은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6G·7G로 진화할수록 중국의 장악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미국조차 중국의 기술 패권에 휘둘리는 차이나 딜레마의 증폭이다.

코로나19는 이런 시점에서 세계화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이탈리아는 국민 전체의 이동이 봉쇄되다시피 했고, 스페인에서도 4600만명의 이동을 봉쇄하는 조치가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지난 주말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야당이 주도하는 하원은 초당적으로 유급 의료휴가 등을 포함한 ‘코로나 뉴딜’을 통과시켰다. 그만큼 세계 경제 위축이 크다는 얘기다.

보호무역의 장벽도 높아질 전망이다.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정책국장은 국가간 입국 금지와 의약품 수출이 차단되는 사태를 보면서 “코로나19가 위기 앞에서는 동맹도 없다는 걸 잘 보여주고 있다”면서 “해외로 나간 제조업 공급망을 다시 미국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주요 다국적 기업의 고심은 깊어지고 있다. 시가총액 기준으로 세계 최대 기업인 애플은 코로나19 사태가 커지면서 중국 생산량이 50%로 줄어들었다. 중국에 공장이 없는 소프트웨어 기업도 마찬가지다. 컴퓨터와 휴대전화 운영 시스템을 공급하는 퀄컴은 “중국에서 사업 계획을 바꿀 계획이 없다”고 했지만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게 됐다.

세계화의 함정 드러나

주요 20개국 수출 의존도

주요 20개국 수출 의존도

한국 기업이야말로 더 심각한 위기를 드러냈다. 삼성·현대·LG·SK 등 한국의 글로벌 기업은 코로나19가 발생하자 줄줄이 공장을 세우거나 생산 활동을 줄일 수밖에 없어졌다. 한국인의 중국 출입 자체가 어려워져 경제 활동이 위축되면서다. FT는 “중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사슬이 갑자기 끊어지면서 기업의 손실은 불가피해졌다”고 분석했다. 삼성전자 대표이사를 거쳐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진대제 스카이레이크 회장은 “과도한 중국 의존도가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며 “공장 이전까지는 아니라도 핵심기술은 국내에서 꼭 쥐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이번 사태는 중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사슬 재편을 가속할 가능성이 크다. NYT는 “코로나19 사태로 세계화의 함정이 명백히 드러났다”고 진단했고, FT는 “독일·러시아·터키가 앞다퉈 의약품 수출을 통제하고 나서면서 트럼프가 주창해온 해외 미국 기업의 본국 회귀 정책을 정당화시켜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번 사태는 과도한 중국 의존도는 중국의 부당한 외국 기업 차별과 기술 탈취 대응도 어렵지만, 빌 게이츠가 예측한 것처럼 역병에 대처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과도한 중국 의존도가 위험한 것은 이번에 코로나19 사망자가 중국과 교류가 많았던 이탈리아·이란·한국에서 많았다는 점을 통해서도 확실히 드러났다.

중국의 성장 둔화도 위험 부담이다. 중국 의존도가 높을수록 동반 침체를 피할 수 없다.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경제 기관은 올해 중국이 6%대의 성장률을 지키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해 왔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 중국의 성장률이 4.8%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수출의 26%를 중국에 의존하는 한국의 성장률은 1.1%로 떨어질 것으로 봤다. 미 의회전문 매체 더힐(The Hill)은 “이번 사태로 중국은 경제적 심장마비 상태”라며 “이 여파로 글로벌 경기침체가 우려된다”고 했다.

한국은 리쇼어링 서둘러야

한국의 선택은 자명해졌다. 한국은 이번에 전 세계 110여 개국으로부터 입국 제한을 당했다. 특히 중국·베트남은 한국 기업이 대거 진출해 있는 곳이다. 베트남은 중국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이후 대체 지역으로 급부상하면서 삼성·SK 등 국내 기업이 투자 비중을 급격히 늘려왔다. 경제 교류가 왕성한 일본조차 이 흐름에 가세하면서 한국 경제는 타격이 커지고 있다. 결국 이번 사태는 해외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리쇼어링(본국 귀환)이 시급해졌다는 점을 거듭 확인해주고 있다. 해외에 나가 있는 공장이 국내로 돌아오면 무엇보다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가 늘어난다. 특히 고부가가치 제품의 제조 공장은 국내에 두는 게 좋다.

미국과 일본은 진작에 리쇼어링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기업의 유턴 촉진기관인 ‘리쇼어링 이니셔티브’에 따르면 2010년 95개에 불과했던 유턴 기업 수는 2018년 886개로 9배가량 급증했다. 특히 트럼프 정부 출범 첫해인 2017년 이후 리쇼어링이 급증했다. 미국은 이를 통해 올해부터 제조업 경쟁력 1위를 중국에서 빼앗아온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국도 2012년부터 리쇼어링을 추진했지만 철저히 외면받아왔다. 지난 6년(2014~2019년)간 리턴 기업은 연평균 11개에 불과했다. 이 흐름을 바꾸려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반(反)시장·반기업 정책이 기업의 유턴을 가로막고 있다. 국내 기업은 최근 오히려 최저임금 인상과 획일적인 52시간제 규제를 피해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2018년부터 급증하기 시작한 해외직접투자는 지난해 4~6월 분기 기준으로는 처음으로 150억 달러를 넘어섰다. 특히 이 흐름을 바꾸려면 규제·노동 개혁이 필요하다. 대기업 협력사 관계자는 “제조업은 노동집약적이기 때문에 노동 유연성을 확보해줘야 국내에 공장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김동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