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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던 한인 기업 ‘포에버21’도 한 방에 훅 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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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애자일 경영’의 시대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패션기업 ‘포에버 21’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허름한 옷가게에서 시작해 2011년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으로 칭송받았다. 그 비결은 불과 2~4주 만에 신제품을 생산하는 패스트 패션이었다. 먼저 미국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57개국에 걸쳐 800여 개 매장으로 확장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지난해 9월 파산을 신청했다. 몰락은 한순간이었다. 온라인 시장의 급성장 추세를 간과하고 오프라인 매장을 확장한 탓이었다.

디지털 시대 되면서 속도가 생명 #잘 나가던 기업도 한순간 무너져 #아마존 “매일 창업한다”는 자세 #한국은 규제에 막혀 질식하는 중

트렌드에 민감한 패션업계의 진화 속도는 더 빨라졌다. 소셜 미디어와 빅데이터로 소비자의 취향을 반영해 1~2주 만에 옷을 생산·판매하는 울트라 패스트 패션기업 부후(Boohoo)·아소스(ASOS) 등이 약진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AI) 기술을 적용해 개인 맞춤형 의류 추천 및 배송하는 기업까지 등장했다. ‘의류업계의 넷플릭스’로 불리는 스티치픽스(Stitchfix)의 홈페이지는 설문조사로 시작된다. 자신의 나이·직업·성별·체형, 좋아하는 색상, 옷이 필요한 상황 등을 입력하면 인공지능이 가장 적합한 옷 다섯 벌을 골라 원하는 장소로 보내 준다. 고객의 빅데이터가 쌓이면서 갈수록 판매 적중률이 높아지고 고객 만족도 향상되는 선순환 생태계가 스티치픽스의 최대 강점이다. 한국에서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창궐로 이 같은 리테일 멜트다운(Retail Meltdown·기존 소매점 사업의 해체) 현상이 더욱 빨라질 전망이다.

‘뷰카한 세상’에 적응해야

타성에 젖어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면 세계적 대기업도 한 방에 훅 가는 시대다. 올해 1월 말 타계한 세계적 경영학자,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가 1995년 내놓은 ‘파괴적 혁신’이 예고한 대로다. 아마존·페이스북·구글·텐센트·알리바바는 모두 기존 시장을 파괴하고 디지털 혁신을 주도해 급성장한 테크 기업들이다. S&P 500개 기업 중 75%가 향후 15년 내 바뀌거나 퇴출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한마디로 ‘뷰카(VUCA)한’ 세상이다. 뷰카는 변동성(Volatile)·불확실성(Uncertainty)·복잡성(Complexity)·모호성(Ambiguity)을 의미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애자일(agile)’ 경영이 필수다. 1990년대 IT 용어에서 출발한 애자일은 ‘민첩함’을 뜻한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변화의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 1990년 출시한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가 10억 사용자를 확보하는 데 22년이 걸렸지만 2004년 등장한 G메일은 12년, 페이스북은 9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디지털 혁명이 가속화하며 오프라인 매장이 타격을 입는 등 경영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특히 소매(retail) 시장에서 온라인 기업의 매출이 급증하며 전 세계적으로 폐업하는 골목 가게가 많아졌다.

세계 최고의 상거래 기업으로 성장한 아마존은 여전히 군살 없는 ‘린 스타트업(lean start-up)’ 정신을 지향한다. 아마존의 창업주 베조스는 매일 “오늘이 아마존의 창업일(Day One)”이라고 강조한다. 2017년 아마존 연례 보고서에는 ‘대기업병(Day Two)에서 아마존을 지키는 4가지 법칙’이 명시돼 있다. 진정한 고객 지향, 절차화에 대한 저항, 최신 트렌드에 대한 신속한 대응, 고속 의사결정 시스템. 아마존의 성공 비결은 애자일 경영의 지속적 실천에 있었던 셈이다.

세계 10위 시가총액 기업

세계 10위 시가총액 기업

‘뷰카한’ 환경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창출하려면 기술 혁신·고객 만족을 위한 노력과 더불어 지리적 상상력도 중요하다. 애플·아마존·구글·페이스북 등 4개 기업의 시가 총액은 연초 4조 달러를 뛰어넘어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규모에 이른다. 기존 국가 통계, 경제 수치, 주가 차트를 넘어 장기적 안목에서 세계지도를 보며 전략을 세워야 하는 이유다. 제한된 틀에서 효율성 향상, 품질 개선에만 신경 쓰면 큰 변화를 읽기 어렵다.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는 열심히 일할수록 혁신이 억압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기 쉽다. 글로벌 시장 전체를 조망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지 못하면 고달픈 레드 오션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거대한 디지털 혁명의 물결에 저항하는 기업은 ‘포에버 21’처럼 익사할 운명이다.

과거에 안주하는 순간 위험

그동안 한국은 세계 반도체·스마트폰 시장을 선점해 일본을 압도하는 IT 강국으로 우뚝 섰다. 하지만 파괴적 혁신이 일상화된 세계에서는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는 순간 위험해진다. 게임의 규칙이 바뀌면 이전의 강점이 오히려 장애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빠른 정보화로 칭송받던 한국은 이제는 ‘로봇의 인간 대체 비율 1위 국가’가 되고 있다. 그 어떤 나라보다 혁신이 시급하지만, 관료주의와 규제에 막혀 옴짝달싹 못 하고 있다. 4차 산업시대 인공지능과 연계하고 새로운 사업 영역을 발굴하려면 다양한 공간 정보와 연계된 소비자 빅데이터 선점이 중요하다. 하지만 ‘타다’를 둘러싼 갈등에서 보듯 새로운 시도에 대한 저항의 벽은 높다.

비대해진 몸집으로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는 기업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공룡의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미 플랫폼 기업의 승자 독식 체제가 굳어지고 5세대(5G) 기술의 글로벌 표준이 정해진 상황에서는 기업 간 인수·합병 및 국가 간 협력에서도 속도가 관건이다. 상명하복식 관료조직은 현장과 고객 만족을 우선하고 민첩하게 대응하는 애자일 경영의 적이다. 기업뿐 아니라 모든 조직이 프로젝트 중심으로 유연하게 뭉쳤다 흩어져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 이제는 크고 강한 자가 아니라 애자일하게 움직이는 자만 살아남는다.

삼성과 소프트뱅크의 차이는 애자일 경영

오젝

오젝

2010년대 초반 블랙베리가 사라지는 전환기에 삼성은 과감한 마케팅과 현지화 전략으로 스마트폰 시장을 선점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압도적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당시 인도네시아 소비자는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바꾸는 스마트폰의 마법에 열광했다. 하지만 삼성은 시장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인도네시아에선 스마트폰을 활용하는 서비스와 다양한 앱이 등장했고 스타트업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2010년 ‘오젝’으로 불리는 오토바이를 연결하는 작은 회사였던 고젝(Go-Jek)은 차량 공유(Go-car), 음식 배달(Go-food), 마사지(Go-massage), 금융(Go-pay) 등으로 서비스 영역을 급속히 확장하며 동남아의 슈퍼 앱으로 급부상했다. 자카르타로 글로벌 벤처 자본이 몰려들며 2016년 고젝, 2017년 트래블로카, 토코피디아 등 유니콘 기업이 연달아 탄생했다.

2억7000만 인구를 보유한 인도네시아는 아세안의 경제 대국일 뿐 아니라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다. 온건한 이슬람 문화에 여성의 경제 활동도 활발한 인도네시아는 18억 명에 달하는 세계 무슬림 소비시장의 테스트 베드로서 활용가치도 높다.

인도네시아 디지털 혁명 초창기에 삼성이 토종 스타트업을 인수하거나 스마트폰과 연계한 삼성페이 등을 선제적으로 도입했다면 스마트폰과 연계해 아세안과 무슬림 시장을 아우르는 플랫폼 기업으로 도약할 절호의 기회였다. 새롭게 열리는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고 애자일하게 움직이지 못한 삼성은 기존 틀에 갇혀 현상 유지에 급급했다.

반면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말레이시아에서 시작된 차량 공유 스타트업, 그랩(Grab)의 잠재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2014년 재빨리 투자해 아세안 플랫폼 시장을 단숨에 장악했다. 나아가 2016년 조성된 비전 펀드에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를 비롯해 아랍의 자본을 끌어들여 전 세계 스타트업의 지도를 새롭게 그려가고 있다. 2018년 삼성계열사가 ‘데카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에 등극한 고젝에 뒤늦게 투자했지만 이미 큰 게임은 다 끝난 후였다. 삼성은 레드오션이 되어가는 인도네시아 스마트폰 시장에서 오포(Oppo)·비보(Vivo) 등 중국 기업에 밀리며 고전하고 있다. 넓고 멀리 보는 지리적 상상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김이재 경인교대 지리적상상력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