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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관범의 독사신론(讀史新論)

“당파 버리고 단결하라” 그날의 매서운 채찍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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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00년 전 임시정부의 3·1절 기념식

1921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2회 3·1운동 기념식 현장. ‘독립선언기념’‘대한민국’ 문구가 선명하다. 태극기 등 만국기도 걸렸다. [사진 독립기념관]

1921년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2회 3·1운동 기념식 현장. ‘독립선언기념’‘대한민국’ 문구가 선명하다. 태극기 등 만국기도 걸렸다. [사진 독립기념관]

지난해 3·1절에 중화인민공화국 쓰촨성(泗川省) 청두(成都)를 방문한 적이 있다. 주(駐)청두 한국총영사관이 마련한 기념행사에 참석해 ‘문명, 자강, 독립’이라는 제목으로 특별 강연을 했다. 역사 특강에 이어 기념식이 거행됐다. 국민의례, 독립선언서 낭독, 대통령 3·1절 기념사 대독, 심훈의 시 ‘그 날이 오면’ 낭송, 만세 삼창의 식순이었다.

상하이 대극장 달군 태극기 물결 #러시아인도 ‘만세’ 외치며 함께해 #이념 대립으로 빛바랜 3·1정신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나

중국 땅에서 처음 맞이하는 3·1절, 그 날의 빗소리가 나그네의 여정(旅情)을 흔들었다. 이튿날 오전 찾아간 시성(詩聖) 두보(杜甫) 초당은 화창한 봄날이었다. 이곳은 촉견폐일(蜀犬吠日·촉 지방의 개는 해가 나면 짖는다)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맑은 날이 드문 지방으로 알려져 있는데 마치 하늘이 내려준 선물 같았다.

지난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3·1운동 자체가 대한민국의 건국과 직결된 특별한 사건이니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의 3·1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1948년 7월 제정된 대한민국 제헌헌법에는 제정 당시 대한민국 국회의장 이승만 명의의 헌법 전문이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 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 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로 시작한다.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1948년 총선거를 실시하여 대한민국을 재건했다는 뜻이다.

“10년간 못 본 국기 달았다” 울음바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동휘·이동녕·손정도·안창호. [중앙포토]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동휘·이동녕·손정도·안창호. [중앙포토]

3·1운동이 일어난 해는 1919년이지만 3·1운동 기념식이 처음 치러진 해는 이듬해 1920년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 맞이한 첫 번째 3·1절,  ‘독립신문’은 이날의 풍경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오전 6시부터 상하이(上海) 시내 한인 거주지 곳곳에 태극기가 게양됐는데, 행사 며칠 전부터 마치 명절을 맞듯 집집마다 준비를 했다고 한다.

상하이 외국인 조계지에서 영국·프랑스·미국 국기가 그 나라의 국경일에 걸렸던 일을 늘 보아왔던 한국인에게 3·1절에 상하이에서 나부끼는 태극기란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감격을 일으키는 존재였다. 동시에 한 치의 땅도 회복하지 못해 아직도 옥중에서 고통받는 동포를 구원하지 못한 현실을 가슴 아프게 일깨우는 존재였다.

독립선언 기념 축하식은 오전 10시 의정원 건물에서 열렸다. 국무총리 이동휘 이하 정부 각료와 직원들, 그리고 의정원 의원들과 학생들, 총 80여 명이 참석했다. 기념식은 애국가 합창, 국기 경례, 이동휘의 식사, 의정원 의장 손정도의 축사, 독립군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합창, 민국 만세 삼창 순서로 진행됐다.

1920년 상하이에서 열린 제1회 3·1절 행사 장면.

1920년 상하이에서 열린 제1회 3·1절 행사 장면.

오후 2시에는 상하이 정안사로(靜安寺路) 올림픽 대극장에서 축하회가 열렸는데, 한인 동포 700여 명과 중국인 및 서양인 100여 명이 참석했다. ‘대륙보’(大陸報·China Press) ‘구국일보’(救國日報) 등 현지 언론사 기자들도 와 있었다. 특히 ‘대륙보’는 1919년 3월 4일 1면 기사에 3·1운동을 소개한 영문 매체였다.

무대 배경에는 태극기가 교차한 위에 붉은 비단에 금색 글씨를 쓴 ‘대한독립선언기념’이라는 폭과 ‘독립만세’라는 축이 걸려 있었다. 무대 동쪽에는 한국·영국·미국의 국기, 무대 서쪽에는 한국·중국·프랑스의 국기가 각각 삼각으로 교차해 있었다. 천장에는 일본 국기를 제외한 만국기가 장식돼 있었다.

축하회의 하이라이트는 대형 태극기를 올려세우는 상기식(上旗式)이었다. 상기식이란 무대 정면 음악대를 지휘하는 단상 위에 세운 깃대 끝에 길이 약 12~13척(1척은 약 30㎝) 정도 되는 태극기를 매다는 의식이었다. 이동휘 총리 이하 각부 총장들과 김가진·박은식의 두 국가 원로(國老)가 줄을 잡아당길 준비를 했고, 이광수·신익희·선우혁 등 각 단체 대표가 태극기를 받들고 있었다.

애국가 소리와 함께 줄을 잡아당기자 태극기가 천천히 올라왔는데 깃발의 끄트머리가 보이고 괘 하나가 보이고 드디어 태극의 일부가 보이자 여기저기 울음소리가 터지기 시작하더니 태극기가 깃대의 정상에 완전히 오르자 방성통곡이 퍼져나갔다.

장내 통곡 소리는 국기 경례 후 사회자 여운형의 연설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우리 민족이 노예 된 지 벌써 10년이오. 이천만 남녀가 대한독립 선언한 지 이미 1주년이오. 나는 미국 독립기념일 7월 4일과 중국 혁명기념일 10월 10일 기념식에 참석할 때마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오. 이제 10년간 못 보던 국기를 다시 달고 10년간 못 부르던 애국가를 다시 부르게 되었소. 동포여, 여러분은 저기 올라간 저 국기를 다시 땅에 떨어뜨리려 하십니까? 한번 높이 단 이 깃발을 영원히 빛나게 합시다.”

이어서 독립선언서 낭독, 기념 촬영, 이동휘·이동녕·안창호의 축사, 중국인 리런제(李人傑)의 축사가 이어졌고 중국 남녀 학생의 검무 공연을 끝으로 모든 일정이 끝났다.

박은식의 호소 “권력투쟁을 중단하라”

1920년 3월 4일자 독립신문 1면. 상하이에서 열린 제1회 3·1절 기념식 행사를 전하고 있다.

1920년 3월 4일자 독립신문 1면. 상하이에서 열린 제1회 3·1절 기념식 행사를 전하고 있다.

축하식이 파한 뒤에는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극장에서 나온 인파는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정안사로 전찻길을 따라 긴 행렬을 이루며 걷다가 형형색색 축제 분위기 속에서 흩어졌다. 그중에 일부는 자동차 몇 대에 나누어 타고 태극기를 높이 달아 만세 소리를 외치며 하비로(霞飛路)·서장로(西藏路)·대마로(大馬路)에 출몰했고, 다시 황포탄(黃浦灘) 방면으로 나가 일본인 시가가 있는 홍코우 방면에 돌진해서 밤늦게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한인 시위대와 만난 러시아 사람들도 ‘우라(만세)’를 외치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로부터 꼭 2주가 지난 3월 15일 러시아혁명 기념일 축하식에는 여운형(대한민단 단장)과 이광수(독립신문사 사장)가 초대돼 참석했다. 사회자의 공식 제의로 한국 독립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행사에 참석한 러시아인 1000여 명이 기립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제1회 독립선언 기념 축하식은 성황리에 끝났지만 이날 축사를 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세 지도자는 앞날에 대한 구상이 서로 달랐다. 이동휘는 과거의 평화주의 방침을 변경해 금년부터는 혈전을 단행하자고 주장했다. 이동녕은 공상과 공담을 버리고 힘을 내고 돈을 내어 한덩어리가 되자고 외쳤다. 안창호는 3·1운동이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생일이라 했고, 본래의 3·1 정신에 따라 전쟁이냐 외교냐 하는 노선 대립에 빠지지 말고 이승만과 이동휘 아래에서 통일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행히도 정부 안에서 이승만과 이동휘의 정치적 대립은 그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1921년 상하이를 떠났고, 임시정부는 표류했다. 국가 원로 박은식은 이듬해 제3회 3·1절 기념사에서 2000만 동포의 대동단결을 부르짖었다.

1925년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된 그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3·1 정신으로 세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중단되지 않고 독립을 이룩할 수 있도록 모든 지사와 단체가 정부를 구심점으로 인심을 통일할 것을 호소했다. 그는 대통령 퇴임사에서도 지방과 당파를 갈라 서로 권력 투쟁하지 말고 중국·러시아·인도와 연합하는 세계주의를 지향하라고 당부했다.

박은식 대통령의 호소와 당부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도 경청할 만하다. 국가의 재난을 만났으면 대동단결의 정신으로 슬기롭게 이겨내는 것이 옳다. 3·1절 기념식 100주년의 해를 만나 3·1정신의 의미를 다시금 새겨본다.

'정의를 누를 검은 없다' 빛나는 통역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2020년 할리우드에 우뚝 섰다. 봉 감독 못지않게 통역사 샤론 최도 빛났다. 감독의 마음을 꿰뚫는 언어로 ‘봉준호의 입’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1920년 상하이 3·1절 기념식도 한국 통역의 역사에서 길이 빛날 명장면의 하나로 꼽을 만하다. 중국인 리런제의 통역을 맡은 독립운동가 백영엽(白永燁)은 유창한 통역으로 청중에게 깊은 감동을 줬다. 특히 통역하면서 구사한 문장이 비장했다고 전해진다.

이를테면 리런제는 일본이라는 홍해(紅海)가 앞에 있어도 한·중 양국이 일심 일체가 돼 정의로만 싸우면 최후의 승리를 기필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연설했는데, 이 대목에서 백영엽은 “강권을 믿는 자를 누를 검(劍)은 있느니라! 자본을 믿는 자를 누를 검은 있느니라! 그러나 정의를 믿는 자를 누를 검은 없을지니라!” 하며 사자후를 토해냈다. 독립을 향한 열정이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생생하기만 하다.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