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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직·승진 코스?'…역사속으로 사라진 대법원 판사 공보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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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연합뉴스]

대법원 [연합뉴스]

"저의 임기 중 법원 사무처 비법관화를 반드시 완성할 것입니다"

2018년 12월 김명수 대법원장이 국회에 법원 조직과 관련한 의견을 보내며 법원 구성원들에게 남긴 말이다.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2020년 법원 정기인사에서 대법원 내 첫 '전원 비법관 부서'가 나왔다. 바로 대법원 법원행정처 공보관실이다. 1993년 처음 생긴 법원행정처 공보관은 그간 쭉 판사가 맡아왔는데 올해 처음으로 판사가 아닌 법원 고위직 공무원이 맡게 됐다. 대법원의 주요 사법행정 사항을 언론과 국민에게 알리는 법원행정처 공보관은 대법원의 얼굴이라 불리며 엘리트 판사들의 요직으로 간주돼왔다.

누가 공보관 거쳤나

역대 법원행정처 공보관. 그래픽=신재민 기자

역대 법원행정처 공보관. 그래픽=신재민 기자

초대 대법원 법원행정처 공보관은 목영준(65ㆍ사법연수원 10기) 전 헌법재판관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니 언론에서 법원 판결을 정확히 전달해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고민 끝에 공보관이 만들어지게 된 거예요" 목 재판관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대법원에 처음 공보관 제도가 도입되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당시 윤관 대법원장 취임 이후 '사법제도발전위원회'를 만들어 사법개혁에 나섰고 이를 어떻게 국민에게 알릴지가 가장 큰 과제였다"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았다.

대법원 법원행정처 공보관을 두 번이나 거친 법관도 있다. 오석준(58·19기) 서울고법 부장판사다. 그는 2001~2003년, 2008~2010년 각각 한번씩 공보관을 역임했다. 앞선 임기는 평판사로 있을 때, 두 번째 임기는 지방법원 부장판사로 보임한 뒤 맡았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 시절 공보관 역량을 강화한다는 취지로 평판사가 맡던 법원행정처 공보관을 지법 부장판사가 맡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번 인사에서 퇴임한 이정석(55·22기)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도 공보관이었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행정처 공보관 중에는 대개 공보관만 한 게 아니라 그 이전·이후에도 행정처에서 업무를 맡아 잘해낸 케이스가 많다"며 "일 잘하고 주변 사람들과 잘 지내기로 알려진 사람들이 많이 거친 자리"라고 말했다.

공보관끼리 묘한 인연도 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사건 1·2심 재판장은 모두 행정처 공보관을 역임한 판사였다. 조병구(46·28기) 부장판사는 행정처 공보관에서 일선 법원으로 돌아간 2018년 안 전 지사 1심을 맡아 무죄를 선고했다. 2011년 행정처 공보관이었던 홍동기(52·22기) 부장판사는 2019년 서울고법에서 안 전 지사의 2심 유죄를 선고했다. 16대 공보관까지 두 번 역임한 오 부장판사를 고려하면 15명의 판사가 행정처 공보관 자리를 거쳤다.

왜 공보관실부터?…우려와 기대

올해 17대부터는 진준오(법원행정고시18기) 공보관이 첫 법원행정처 비법관 공보관으로 부임했다. 김 대법원장이 "기존 법원행정처 시스템을 개선하고, 향후 만들어질 법원 사무처에는 법관이 상근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선언한 뒤 공보관실이 가장 먼저 비법관화가 된 것이다. 진 신임 공보관은 "사법행정과 재판을 비교적 가장 명료하게 분리할 수 있는 자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9월 재판 내용을 알리는 '재판공보연구관'을 따로 만들어 '사법행정 공보'와 '재판 공보'를 분리한 것도 이 취지다. 대법원 판결 내용을 가장 충실히 설명할 수 있는 재판연구관이 재판공보관을 맡는다. 배상원(46·34기) 부장판사가 지난해 활약했고 올해는 이종길(50·32기) 부장판사가 재판 공보 업무를 맡았다.

현행 법원조직법상 법원행정처장과 차장은 판사가 맡게 되어있고, 실·국장 역시 판사 또는 법원 공무원이 맡게 돼 있는 것도 공보관실이 가장 먼저 비법관화된 이유다. 현행법이 바뀌지 않는 한 행정처의 다른 부서를 비법관으로 채우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즉 이번 공보관실 비법관화는 국회 입법으로 법이 바뀌기 전 김명수 대법원이 할 수 있는 '법원행정처 비법관화' 개혁의 과도기적 결정이라 볼 수 있다.

행정처 공보관의 비법관화에 대해 법원 내·외부에서도 우려와 기대가 동시에 나온다. 과거 공보관을 거친 이들 사이에서도 전망은 나뉘었다. 한 전임 공보관은 우려의 목소리에 대해 "제도 변화는 시간이 지나봐야 그 결과에 대해 논할 수 있다"며 "제도를 잘 정착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른 전임 공보관은 "법원, 판사 등 내부 사회 이야기를 듣고 싶은 수요에 잘 대응할 수 있을까 의문은 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임 공보관도 "일반 회사에서 홍보 실장, 차장, 부장을 두는 것과 행정 영역이라도 법률에 대해 공식적 입장을 내놓아야 하는 법원은 다르다"며 걱정했다.

다만 불가피하게 필요한 조처라는 시각도 있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이후 법관이 행정 영역에서 주도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워진 분위기"라며 "오히려 판사가 아닌 점이 장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수정·백희연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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