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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파리의 나혜석’ 윤정희, 루브르박물관서 도둑 촬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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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920년대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파리 생활을 그린 ‘화조’(1978). 신영균·윤정희가 함께한 마지막 영화다. [중앙포토]

1920년대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파리 생활을 그린 ‘화조’(1978). 신영균·윤정희가 함께한 마지막 영화다. [중앙포토]

“멋진 여배우.”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56) #<27> ‘멋진 여배우’ 윤정희 #재불화가 다룬 ‘화조’ 허가 못받아 #카메라 분해한 후 화장실서 조립 #문희·남정임과 60년대 트로이카 #2012년 ‘세계의 여배우’ 2위 올라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VIP 시사회에 참석했을 때 주연 윤정희는 어떤 여배우냐는 질문을 받고 이 다섯 글자로 답을 했다. 간결하지만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말이었다. 영화계 선배이자 동지인 내가 봐도 윤정희는 너무나 멋진 배우다.

1960~1970년대를 풍미한 배우 중 죽는 순간까지도 배우일 단 한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윤정희였다. 윤정희 자신도 “영화배우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전혀 없다.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배우를 하고 싶다”고 공언해왔다. 그런 그가 10년 넘게 알츠하이머를 앓았다는 사실이 최근 알려지면서 많은 팬들이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나는 윤정희 가족과도 자주 왕래하는 사이라 그의 투병 사실을 오래전 알게 됐지만 지금도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늘 그랬듯이 나를 보면 “회장님, 저희 좋은 작품 하나 같이해야지요”라며 반갑게 맞을 것만 같다. 나도 영화를 다시 찍게 된다면 상대역 1순위로 윤정희를 생각해왔다.

1967년 데뷔작 ‘청춘극장’ 빅 히트

윤정희의 데뷔작 ‘청춘극장’(1967). 그해 한국영화 흥행 1위에 올랐다. [중앙포토]

윤정희의 데뷔작 ‘청춘극장’(1967). 그해 한국영화 흥행 1위에 올랐다. [중앙포토]

우리의 우정은 67년 ‘보은의 기적’으로 시작한다. 지금까지 내 마지막 작품인 ‘화조’(1978)까지 총 49편의 영화에서 함께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흥행작으론 ‘천하장사 임꺽정’ ‘소라의 꿈’ ‘당신’ ‘저 눈밭에 사슴이’ ‘여자로 태어나서’ ‘이조여인 잔혹사’ ‘비운의 왕비’ ‘내일의 팔도강산’ 등이 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과부’(1960)로 데뷔한 7년차 중견 배우였고, 윤정희는 ‘청춘극장’으로 스크린에 등장한 신인이었다. 윤정희는 첫 작품부터 주연을 맡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그해 대종상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이후 윤정희가 문희·남정임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연 주역이라는 건 익히 알려진 얘기다. 윤정희는 데뷔 첫해에만 16편을 찍고 이후 7년 동안 300여 편에 출연했다. 청룡상·대종상 등에서 여우주연상만 29번을 받았다. 영화 ‘시’로 2011년 LA비평가협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2012년 전미비평가협회 선정 세계 최우수 여배우 2위 기록도 세웠다.

신성일·고은아도 함께한 ‘청춘극장’은 윤정희에게 데뷔작 이상의 큰 의미가 있다. 66년 당시 합동영화사에서 이 영화 배역 ‘유경’을 두고 오디션을 했는데 1200명이 지원했다. 윤정희는 대학생 시절 김래성 작가의 원작 소설을 읽고 유경 역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때마침 오디션을 한다는 소식에 도전장을 냈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은 비결을 물으면 윤정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된 것 같다”며 겸손한 미소를 짓는다. 가톨릭 신자인 윤정희는 명동성당 주임 신부에게 배우의 길을 가도 되는지 물었을 만큼 신앙심이 깊다. “네가 부끄럽지 않은 배우가 된다면 찬성한다.” 신부의 이 말은 지금의 윤정희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우리가 ‘청춘극장’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건 개봉 40년이 훌쩍 지나서였다. 한국영상자료원은 2007년 홍콩필름아카이브에서 16㎜ 중국어 더빙 프린트를 수집해 35㎜로 복원했고 2년 후 처음 공개했다. 당시 국제극장에서 27만 명이 본, 요즘으로 치면 천만 영화를 늦게나마 소장하게 됐다니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 데뷔작인 ‘과부’는 아직도 필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나와 윤정희의 마지막 작품인 ‘화조’는 한국 근대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극 중 가정이 있는 나혜석(윤정희)이 프랑스 유학 시절 최린(나)을 만나 밀회를 즐기는 장면이 나온다. 78년 3월, 김수용 감독과 나는 촬영차 프랑스로 향했다. 윤정희는 5년 전 영화를 공부하려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고 76년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해 파리에서 둥지를 튼 상태였다.

유창한 프랑스어로 경비원 설득해

2010년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이창동 감독의 ‘시’. [중앙포토]

2010년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이창동 감독의 ‘시’. [중앙포토]

수많은 에피소드 중 ‘도둑 촬영’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김수용 감독은 주요 촬영지로 루브르박물관을 골랐다. 1930년대 프랑스 도심 풍경을 담아내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물관 내부 촬영 허가를 받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카메라 등 촬영 장비들을 분해해 남자들 코트 속에 숨기고 박물관 진입을 시도했다. 무사히 입구를 통과한 후 화장실에 모여 장비들을 조립한 다음 몰래 촬영을 하는 식이었다.

숨막히는 숨바꼭질이 끝나갈 무렵, 한 경비원이 카메라 렌즈를 가리며 큰소리로 동료들을 불렀다. ‘아, 이렇게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되나’ 싶었던 순간 윤정희가 앞에 나섰다. 더 큰소리로 당당하게 항의하니 상대방이 좀 당황한 기색이었다. 유창한 불어로 얘기해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윤정희가 이겼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김 감독은 상대 여성이 끝내 털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윤정희의 파리 신혼집도 둘러볼 수 있었다. 삐그덕 소리가 나는 나무 계단을 오르니 방이 하나 나왔는데 백건우의 피아노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을 뿐 침대조차 없었다. 당시에는 형편이 어렵기도 했지만 소박한 부부의 성격이 묻어났다. 윤정희는 한참 후에 내 제주도 집에 놀러 와서는 “선생님, 다시 파리 한번 오세요. 이제 주무실 곳도 있어요”라고 말했다.

2년 전 서울대총동창회 회장단 송년회에 고문으로 참석해 ‘백건우 건배사’를 한 적이 있다. “백 세까지 건강하게 우정을 가지고 살자”는 의미로 우리 세대의 소망을 담았다. 윤정희·백건우 부부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여생을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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