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이후 한·중 교류 왜 주춤해졌나|신세진 북한 너무 의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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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지난해 4월 중국이 산동성을 한국에 개방한다고 정식 통보한 뒤 순탄한 발전을 거듭하던 한·중 무역관계가 6·4천안문사태 이후 답보상태에 머무르고있다.
지난 9월 한국의 국제민간경제협의회(IPECK) 고위경제사절단의 방중이 출발직전 중국 측에 의해 돌연 무기 연기되어 중국의 대한정책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마저 낳았다.
지난달 서울에서 개최됐던 한민족체육대회에 유독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중심으로 한 중국 내 조선족들은 중국당국의 출국허가를 받지 못해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런가하면 비슷한 시기에 서울에서 개최된 국제심포지엄에 참가키로 했던 중국의 비중 있는 학자들도 중국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했다.
이 같은 일들은 한중양국이 최근 몇 년간 확실히 쌓아올린 경제무역 등 실질적 관계에 있어서나 지난해 봄 이후 상당한 속도로 진행되어온 양국관계의 진전과는 대조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중국 측의 주춤한 반응들이 일시적인 것인지 또는 대한정책의 수정을 의미하는지 아직까지는 미지수다.
중국 측 관계자들은 이런 현상들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대한정책에는 변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천안문사태 이후 중국당국은 외국기자와 접촉할만한 고위관계자들을 위해 인터뷰 답변용 내부지침서를 작성했다.
이 비밀 지침서는『현재 중국과 남조선의 경제교역에 어떤 새로운 진전이 있는가. 현재의 정책을 변경할 준비는』이라는 질문을 방을 경우『양국간에는 정부차원의 정치관계나 경제무역관계는 없다. 그러나 쌍방 기업간에는 민간무역 및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양국의 경제교역 관계는 조선반도(한반도) 정세안정과 남북통일촉진을 위해 유리한 방향으로 처리돼야한다. 현재의 정책에는 어떤 변화도 없다』라고 답변토록 하고있다.
그러나 최근의 한·중 관계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흐름은 6·4천안문사태 전에 비해 무언가 변화의 기미가 있다.
물론 6·4사태라는 엄청난 사태를 진압한 중국이 내부수습과 정리에 골몰하여 그만큼 한국과의 관계개선이라는 민감한 문제는 뒤로 제쳐놓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또 세계적인 비난과는 달리 중국당국의 조치를 전폭적이고도 일관되게 지지해준 북한의 입장도 십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최근 중·북한간에 의례적인 수준이상의 당·정·군 대표들의 방문이 활발해진 것은 천안문사태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렵던 사태변화라고 하겠다.
북한과 소련이 지난 9월 비밀 합동군사훈련을 가졌다는 것도 눈 여겨 볼만한 일이다.
중·소화해와 세계적인 대립완화추세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만은 그러한 조짐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거 전 미 국무부차관보가 이 달 하순 북한을 방문할 예정인데다 노태우 대통령이 미국 측의 초청으로 방미, 한·미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미국은 노 대통령의 방문과 관련, 표면적으로는 한국의 북방정책을 지지하나 속셈으로까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관측들이다. 북한과 중국, 북한과 소련 사이의 빈번한 내왕들은 한반도 주변정세가 보다 복합적인 이해관계 속에 꿈틀거리고있다는 가정을 가능케 한다.
한·중 관계개선이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전제로 한 스스로의 노력에 힘입은바 크지만 87년 말 중거리 핵 전력(INF) 감축을 타결 지은 미·소 정상회담을 전환점으로 하는 미·소의 긴장완화와 미·중·소 3대강국의 관계 재정립이라는 큰 흐름에 영향을 받는 것임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작년 봄부터 순풍에 돛단 듯 순항을 계속하던 한·중 관계가 최근 답보상태에 머물러있는 것도 양국관계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한반도 주변정세를 중심으로 한 큰 흐름 속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중국의 입장을 보면 대한관계개선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핵심이 되기도 하는 요체는 무엇보다도 대만과 북한과의 관계다.
우리측에서 보면 북한과 중국관계가 한·중 관계를 개선하는 절대적 요소이지만 중국의 입장에서는 대만문제가 북한 못지 않은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북경당국은 대만이 중국영토의 일부분이라는「1개의 중국」정책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으며 최근 대만과 수교 또는 복교한 그레나다 등 3개 소국과 중국이 단교조치를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한· 중 관계의 급속한 발전이나 공식관계로의 승격은「두개의 한국」이라는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고 이는「1개의중국」정책과 모순을 빚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꺼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경제무역관계를 바탕으로 한·중 관계를 공식관계로 끌고 가려는 우리 정부의 정책이 저항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
이미 무역사무소를 개설한 소련의 대한 접근속도에 비해 중국의 대한 접근 자세가 미온적인 것은 소련이 중국에 비해 북한문제에 있어 운신의 폭이 넓은 탓도 있지만 소련에는 대만과 같은 걸림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대만과 북한카드를 이유로 대한교섭에 있어 자선들의 이익과 원칙만을 고수할 뿐 좀처럼 타협의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조공·사대외교라는 5천년간의 양국 관계를 청산하고 민족자존과 호혜평등의 원칙에서 대등한 관계로 재출발하자는 우리 외교 안보 팀의 논리로 맞서있는 상황이다.
한편 우리내부는 실리추구위주의 경제 팀 논리와「생존과 원칙」의 외교·안보 팀 논리가 팽팽히 맞서있는데다가 이들간에 파워게임의 양상마저 띠고 있다.
또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와 국제민간경제협의회 등이 공 다툼을 벌이면서 우리의 전략을 중국 쪽에 노출시켜 협상위치를 약화시키고 있는 현실도 청산되지 않고 있다.
중국의 대한접근이 통일적·계획적·조직적인데 비해 우리의 상황이 딴판인 것도 커다란 문제점이다.
국제정치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한·중 공식관계 수립을 각자의 재임기간 동안에 이뤄보겠다는 욕심을 부려 결국 국가이익을 해치고 있는 꼴이다.
중국문제 등 노하우가 축적 안된 공산권문제는 참다운 전문가의 견해를 겸허하게 경청, 수용하는 바탕 위에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수순을 피하고서는 올바르게 목표점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훙콩=박병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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