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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비즈니스 현장에 묻다

“그땐 돈을 번 줄 알았는데 기회를 놓쳤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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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아마존에 올라탄 ‘내일의 아마존’ 베스핀글로벌 이한주 대표

베스핀글로벌 이한주 대표(왼쪽)와 이해민 회장. 이 회장은 아들이 창업한 회사에 잠깐이라도 매일 출근해 아들이 미처 챙기지 못하는 부분을 챙긴다. 어려운 선택의 순간엔 지난 수십년 간 축적한 지혜를 빌려준다. 실리콘밸리의 많은 기업들이 이상적인 조합으로 꼽는 카리스마 넘치는 젊은 창업자와 인생 경험이 풍부한 ‘일터의 현자’ 구도 그대로다. 최정동 기자

베스핀글로벌 이한주 대표(왼쪽)와 이해민 회장. 이 회장은 아들이 창업한 회사에 잠깐이라도 매일 출근해 아들이 미처 챙기지 못하는 부분을 챙긴다. 어려운 선택의 순간엔 지난 수십년 간 축적한 지혜를 빌려준다. 실리콘밸리의 많은 기업들이 이상적인 조합으로 꼽는 카리스마 넘치는 젊은 창업자와 인생 경험이 풍부한 ‘일터의 현자’ 구도 그대로다. 최정동 기자

“처참했다. 15년의 고민과 고생이 고작 이 숫자인가 싶어 정신이 멍해지고 몸은 고통스러웠다. 다시는 이런 기분을 느끼기 싫었다.”

첫 창업으로 수천억 벌고도 ‘참담’ #클라우드 선점 기회 놓친 게 후회 #아버지 세대의 반도체 신화 잇는 #‘가장 위대한 기업’ 탄생 꿈 꾼다

창업 15년 만에 회사를 팔고 그 매각 대금이 최종 입금된 걸 확인한 2014년 1월의 그 날을 베스핀글로벌 이한주 대표(48)는 이렇게 표현했다. 물정 모르는 사람이라면 푼돈에 회사를 팔아치울 수밖에 없는 엄청난 실패를 떠올리겠지만 실은 정반대다.

그가 1998년 시카고대 동창들과 시카고 본인 아파트에서 공동창업한 호스트웨이는 5억 달러, 당시 환율로 따지면 5500억 원의 가치를 인정받아 미국 사모펀드에 팔았고, 가장 많은 지분을 보유했던 이 대표는 당장 수천억 원(본인은 함구하지만 업계엔 3000억 원으로 알려짐)의 현금을 손에 쥐었다. 학자금 대주던 부모 몰래 사실상 빈손으로 창업했던 걸 떠올리면 실패는커녕 대부분의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꿈꾸는 완벽한 해피엔딩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는 왜 처참하다고 했을까. 삼성전자 첫 미국 주재원이었던 아버지(이해민 전 삼성전자 대표)를 따라 1983년 한국을 떠난 지 3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클라우드 MSP(운영관리서비스제공자) 기업인 베스핀글로벌을 세운 이유가 여기 있다. 이제 겨우 설립 4년을 넘긴 매출 1000억 원, 국내 직원 580여 명에 불과한 작은 회사가 이미 삼성전자, 중국 국영기업 페트로차이나, 사우디 정부 등을 고객으로 두고 역사상 최고의 IT기업으로 꼽히는 IBM을 뛰어넘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기업이 되겠다는 큰 꿈을 키울 수 있는 토대 역시 이 ‘처참’이라는 단어에서 찾아야 한다.

“일하다 사무실에서 죽는 게 소원”이고, “기업은 무한정 키우되 그 과정에서 얼마를 벌든 세 아이에게 물려주는 대신 전부 다 쓰고 죽겠다”는 이 대표를 서울 서초동 베스핀글로벌 본사에서 만나 그가 했던 후회, 그가 꾸는 꿈에 대해 물었다.

호스트웨이는 어떻게 창업했나.
“맥킨지·골드만삭스 같은 세계 최고의 회사에 다니다가도 다들 사표 쓰고 나와 창업하던 IT붐의 절정기였다. 대학원(시카고대)에서 유전자 치료를 전공 중이었는데 하던 실험이 자꾸 실패하면서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니냐는 불안이 엄습했다. 딱히 좋은 사업 아이디어가 있었던 건 아니고 일단 창업부터 하자고 모였다. 제대로 된 사업을 벌이기 전까지 일단 해보자고 만든 게 개별 회사에 홈페이지 등 웹 서버를 제공해주는 웹호스팅업체 호스트웨이다. 타이밍이 좋았다. 창업하자마자 고객이 몰려 그야말로 돈이 물밀듯 들어왔다. 2002년 분당에 데이터센터를 만들 때 들어간 돈 350억 원 가운데 200억원을 현금으로 질렀을 정도다. 창업 첫해인 1998년부터 투자와 인수 제안이 끊이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15년 동안 투자를 한 번도 받지 않았다.”
투자가 필요 없을 만큼 많이 벌어서였나.
“실리콘밸리쪽 벤처캐피탈(VC)의 투자 제안이 많았는데 다들 실리콘밸리 이전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돈을 잘 벌고 있는데 굳이 회사까지 옮겨가며 투자를 받아야 하나 싶어서 거절했다.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다. 무조건 투자를 받았어야 했다.”
성공적으로 매각했는데 왜 후회하나.
“아마존웹서비스(AWS)와 마이크로소프트(MS) 에저, 구글 클라우드 등 빅3 클라우드 업체들이 지난해 4분기에만 30~60%씩 성장할 만큼 클라우드는 지금 대세다. 웹호스팅은 클라우드 바로 전 단계 서비스인데 만약 그때 투자를 받아 사업을 키웠더라면 지금 아마존과 전 세계 클라우드 시장을 놓고 경쟁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마존이 본격적으로 비슷한 서비스를 내놓기 3년 전인 2004년에 이미 관련 기술 특허를 내고 앞서갔는데 한번 실기하니 격차를 좁히기 어려웠다. 매각 협상이 시작되던 2010년 즈음이 되니 경쟁할 자신이 없었다. 아마존이 클라우드에 연 10조 원씩 투자하는데 설령 기업공개(IPO)를 해 자금을 확보해도 아마존 같은 대규모 투자는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매각을 결심한 이유다.”
그래놓고 왜 실리콘밸리도 아닌 한국에서 클라우드 운영업체(베스핀글로벌)를 창업했나.
“한국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기업이 탄생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처음 창업할 때만 해도 큰 포부가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넘기기에 급했다. 물론 득실만 따진다면 굳이 한국에서 할 이유 없다. 하지만 돈은 벌 만큼 벌었으니 이젠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다.”
가능할까.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아버지 세대가 반도체와 자동차 공장을 짓기 시작했을 때 한국이 잘할 수 있어서 했나. 아니다. 거기에 기회가 있기에 뛰어든 거다. 우리 세대도 다음 세대에 뭔가를 남겨줘야 할 텐데 뭘로 명함을 내놓을 수 있을까 고민해봤다. 비(非) 제조업에서도 세계적 기업이 나올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클라우드라는 새 판이 열리고 있기에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패러다임 전환기마다 늘 새 기회가 열렸다. 뭐가 됐든 성장하는 사업 분야(클라우드)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 클라우드에서 파생되는 산업만으로도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먹고 살 수 있다. 우린 클라우드의 MSP(운영 관리) 분야에서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거다.”
글로벌하게는 엑센츄어라는 막강한 업체가 있고, 국내에선 삼성SDS 등 대기업 계열사가 버티고 있는데 베스핀글로벌에 기회가 올까.
“많은 이들이 어떻게 대기업과 경쟁하느냐고 묻지만 오히려 대기업 계열사들은 안정적 내부 물량이 많다 보니 제대로 경쟁력을 못 키웠다고 생각한다. 또 포털이나 SNS·게임 등 일반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IT기업은 승자독식 경향이 강하지만 우리처럼 기업을 고객으로 둔 엔터프라이즈 IT는 여러 플레이어의 공존이 가능하다. 여기에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AI) 시대가 우리에겐 결정적 기회다. 전 세계 기업 고객 니즈를 맞추느라 엑센추어는 직원이 40만 명에 달한다. 생각해보라. 아무리 작은 회사도 사내 인터넷 시스템 등에 문제가 생기면 이를 처리할 직원이 여럿 있지 않나. 이렇게 과거에 수작업으로 돌리던 걸 우리는 자체 개발한 자동화 시스템 옵스나우로 해결한다. 기업 운영 데이터를 자동으로 모으는 시스템을 구축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아직 부족하지만 올 연말쯤 옵스나우가 안착하면 글로벌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중국 레전드 캐피털,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테마섹 자회사 ST텔레미디어, 한국 디와이홀딩스 등으로부터 1340억 원을 투자받은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최종 목표는 뭔가.
“단계마다 매듭은 물론 중요하겠지만 한번 매각을 경험해보니 허무하기도 하더라. 아니 무섭더라. 스타트업의 성공을 다들 큰돈 받고 파는 거로 여기는데 빌 게이츠가 매각을 했나, 제프 베조스가 매각을 했나. 아니다. 기업을 키웠다. 아마존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아직 전성기 때의 IBM만큼 위대한 기업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 빈 공간을 차지하는 기업을 만들고 싶다.”

아버지를 회장에 영입한 까닭은

일반의 상식은 이렇다. 창업해서 성공하면 경영수업 명목으로 자녀를 하나둘 회사에 들이고 종국엔 물려준다. 그런데 베스핀글로벌은 거꾸로다. 창업한 아들이 아버지를 회장으로 영입했다. 이름만 걸어놓고 월급 빼가는 그런 일부 불량 가족기업의 꼼수가 아니다.

이한주 대표는 삼성전자 대표를 지낸 아버지의 지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로 이해민 회장을 모셨다. 나란히 붙은 집무실에서 근무를 해 보니 처음엔 서로 불편한 것 투성이였다. 삼성식 관리 마인드에 익숙했던 아버지는 사무실의 직원 휴식 공간도 낭비라고 여겼고, 돈을 못 버는데 투자만 몇 년째 계속하는 데 대한 걱정도 많았다. 그런 이 회장이 이젠 거꾸로 삼성전자 후배들에게 경직된 조직문화를 바꾸라고 조언할 정도로 달라졌다.

아버지가 달라지는 동안 이 대표가 받은 도움은 훨씬 많다. 중요한 의사 결정의 순간에 무시 못 할 업력의 지혜를 빌리는 것은 기본. 늘 쓴소리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여느 창업자들과는 마음가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윗세대와의 소통은 소중한 자산”이라며 그가 앞서 창업한 벤처캐피털 스파크랩을 통해 스타트업과 관련 업계 멘토를 연결해주는 작업도 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핫한 IT 기업들이 관련 업계의 시니어를 영입하는 건 아예 하나의 주요 흐름이 됐다. 에어비앤비도 그런 기업 중 하나. 부티크호텔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칩 콘리는 젊은 창업자와 일한 경험을 『일터의 현자』라는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베스핀글로벌은 가족 중에서 일터의 현자를 찾은 셈이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