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봉준호의 출발점, 이춘재연쇄살인사건 "살인이 추억이 돼선 아니 되었듯이…"

중앙일보

입력 2020.02.09 14:00

업데이트 2020.02.09 20:59

2002년 '살인의 추억' 촬영 현장을 지휘하는 봉준호 감독. 아직 서른셋의 앳된 모습이다. [중앙포토]

2002년 '살인의 추억' 촬영 현장을 지휘하는 봉준호 감독. 아직 서른셋의 앳된 모습이다. [중앙포토]

한국영화 최초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그리고 9일 저녁(현지시간) 열릴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감독상․각본상 등 6개 부문 후보…. 한국영화 역사를 새로 쓰며 세계 영화계에 “하나의 장르가 됐다”고 인정받은 사람. ‘기생충’의 봉준호(51) 감독이다.

‘기생충’ 주역 ⑤ 장르가 된 감독 봉준호
김형석 저널리스트의 '살인의 추억' 현장 취재기
“봉준호, 친절하게 설명 잘하는 선생님 같았다”

봉준호란 장르의 출발점은…

거장 봉준호의 출발점은 두 번째 장편 ‘살인의 추억’(2003). 그 자신도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스릴러를 피해왔다. 그것이 제 동력이자 호흡 방식”이라며 그 시작을 ‘살인의 추억’이라 했다. 칸 귀국 직후 인터뷰에서다.

'살인의 추억'은 주연 송강호(왼쪽)가 봉준호 감독과 처음 만난 영화다. [사진 싸이더스]

'살인의 추억'은 주연 송강호(왼쪽)가 봉준호 감독과 처음 만난 영화다. [사진 싸이더스]

촬영 당시 서른셋 신인 봉 감독은 어땠을까. ‘살인의 추억’ 현장 취재를 다녀온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의 회고를 들었다. 이른바 ‘살인의 추억’ 촬영 현장의 추억이다.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에서도 관련 연재물(월간 스크린-한국영화 현장 기행)을 찾아볼 수 있다.

해남 땅끝마을에 펼친 '살인의 추억'

‘살인의 추억’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촬영했다. 2002년 10월 현장 공개 장소는 해남 땅끝마을. 촬영 막바지 무렵이다. 영화는 지난해 33년 만에 범인이 검거되며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으로 다시 명명된 실화가 토대. 영화 제작 당시만 해도 미제 사건이었다. 범인도 안 잡히는 범죄영화를 누가 보겠느냔 우려를 딛고 ‘살인의 추억’은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하며 한국영화사의 걸작 반열에 올랐다.

'살인의 추억' 현장에서 봉준호 감독. 연출 의도에 대해 차분한 목소리로 친절하게 잘 설명하는 선생님 같았다고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는 회고했다. [중앙포토]

'살인의 추억' 현장에서 봉준호 감독. 연출 의도에 대해 차분한 목소리로 친절하게 잘 설명하는 선생님 같았다고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는 회고했다. [중앙포토]

18년 전 그날, 현장에서 만난 봉 감독은 아직 이런 미래를 몰랐다. 어느 아파트단지의 개 실종사건을 그린 첫 장편 ‘플란다스의 개’(2000)로 흥행에서 쓴맛을 본 후였다. 이 작품을 함께한 영화사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가 손실을 보고도 봉 감독의 가능성을 믿고 다시 제작에 나서며 ‘살인의 추억’은 성사됐다.

'기생충' 주역들

이날 아침 일찍 광화문에 모인 취재진은 5시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공개된 장면은 서태윤(김상경) 형사가 갈대밭에 두 번째 희생자 독고현순의 사체가 있을 거라며 대규모 수색을 벌이는 대목. 동료 형사 박두만(송강호)과 조용구(김뢰하)는 길 한쪽에서 실뜨기나 하고 있다. 영화엔 1분도 채 안 나오지만, 캐릭터를 극명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봉준호, 친절한 선생님 같았다"

김 저널리스트는 “공간도 넓었지만 컷을 안 끊고 크레인 촬영으로 쫙 가야 했다”면서 “10월이어서 해도 금방 졌다. 조건이 좋지 않은데 현장 동선 통제도 꽤 있었다”고 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봉 감독은 “친절하게 설명을 잘 해주는 선생님 같았”단다. “봉 감독이 현장에서 카리스마 스타일은 아니다. 스태프들한테 우리가 이 장면에서 뭘 찍어야 한다고, 차분한 목소리로 조목조목 의도를 전달했다.”

2002년 10월 언론에 공개된 '살인의 추억' 촬영 현장에서 출연 배우 김뢰하(오른쪽)에게 실뜨기 시범을 보이는 봉준호 감독이다. 가운데로 송강호가 보인다. [중앙포토]

2002년 10월 언론에 공개된 '살인의 추억' 촬영 현장에서 출연 배우 김뢰하(오른쪽)에게 실뜨기 시범을 보이는 봉준호 감독이다. 가운데로 송강호가 보인다. [중앙포토]

김 저널리스트는 “그럴 수 있는 건 자신이 만든 영화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정확히 알기 때문”이라 했다. “첫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며 고민도 많았을 것”이라며 “어떻게든 좋은 영화로 성공하겠다고 칼도 갈았을 것”이라 말했다.

송강호 '실뜨기' 시나리오엔 없었다

봉준호 영화를 풍부하게 만드는 건“텍스트에 대한 철저한 장악력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설명해줄 수 있는 확신과 계획”, 그리고 한편으론 “즉흥성”이다.

한 예가 이날 촬영 장면의 실뜨기다. 시나리오에 없었지만, 촬영 날 아침 봉 감독이 제안했단다. 한적한 시골 분위기에서 한쪽에선 시체를 찾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선 남자 형사 둘이서 실없는 잡담이나 하며 실뜨기를 하는 모습이 아이러니한 대비를 이룬다. 서둘러 실뜨기 연습에 돌입한 송강호와 김뢰하를, 김상경이 자기 장면도 아닌데 와서 알려주며 도왔다.

영화 '살인의 추억' 제작 공정, 마지막 녹음작업 중 배우 송강호가 봉준호 감독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영화 '살인의 추억' 제작 공정, 마지막 녹음작업 중 배우 송강호가 봉준호 감독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기생충’까지 도합 네 편을 함께한 송강호와 봉 감독, 이른바 ‘봉송 커플’의 첫 만남은 어땠을까. 연극 무대 출신인 송강호는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1997) 조역으로 스크린 데뷔, 송능한 감독의 ‘넘버3’(1997),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2000),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 등을 거치며 당시 충무로 흥행스타로 급부상한 터였다.

봉 감독은 배우들의 아이디어를 많이 끌어내려고 했다고 김 저널리스트는 돌이켰다. “이런 느낌으로 해달라기보다 배우가 ‘이런 거야?’ 물으면 ‘그것도 재밌겠다’고 호응했다. ‘밥은 먹고 다니냐’는 대사도 송강호가 며칠 동안 고민해서 만들어왔다더라”며 “그런 것이 그의 영화를 살아있는 텍스트로 만든다”고 했다.

극 중 송강호가 “여기가 콩밭이냐?” “강간의 왕국이야?” 말한 후 날려 차기 하는 장면도 그렇게 탄생했다. 최근 JTBC 예능 ‘방구석1열’에서 배우 김뢰화가 들려준 얘기다. ‘기생충’ 칸 현지 인터뷰에서 송강호는 “봉 감독은 현장에서 연기 시범도 많이 한다. 액션, 적잖이 움직이는 것들의 시범을 보인다”고도 귀띔했다.

살인이 추억이 되어서는 아니 되었듯이

'살인의 추억' 한 장면. 송강호와 함께 형사 역으로 주연을 맡은 김상경(왼쪽)은 앞서 '생활의 발견'(2002)을 함께한 홍상수 감독이 그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며 출연에 이르렀다.

'살인의 추억' 한 장면. 송강호와 함께 형사 역으로 주연을 맡은 김상경(왼쪽)은 앞서 '생활의 발견'(2002)을 함께한 홍상수 감독이 그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며 출연에 이르렀다.

실제 범인 이춘재 검거 전 첫선을 보인 ‘기생충’ 연출의 글에서 봉 감독은 ‘살인의 추억’을 이렇게 소환했다.

“‘상생 또는 공생’이라는 인간다운 관계가 무너져 내리고 누가 누군가에게 ‘기생’해야만 하는 서글픈 세상 (중략) 그런 세상 한복판에서 발버둥 치는 어느 일가족의, 난리법석 생존투쟁을 지켜보면서 그들에게 ‘기생충’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살인이 추억이 되어서는 아니 되었듯이 이들 또한 애초부터 기생충이 아니었다.”  

'살인의 추억' 현장에서 직접 카메라를 든 봉준호 감독. [중앙포토]

'살인의 추억' 현장에서 직접 카메라를 든 봉준호 감독. [중앙포토]

당시만 해도 미제사건,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아버린 연쇄살인사건을 비롯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1980년대의 부조리한 시대 풍광은 ‘살인의 추억’의 연출 의도 그 자체였다. 이날 현장 공개에서 봉 감독은 취재진에게 “1980년대를 재현하되 기억에 의존한 묘사가 되기를, 그래서 현재와의 거리감은 더 증폭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 낯설음 때문에라도 지금의 관객들이 그저 기억에만 묻어뒀던 미해결의 과거를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되도록 말이다.

'괴물(Host·숙주)' 잇는 '기생충'

이후 그는 송강호와 다시 만난 ‘괴물’(2006)로 1000만 관객을 모은 데 이어 비공식 부문인 감독주간으로 칸영화제에 처음 초청돼 주목받았다. 미군의 한강 독극물 유출사건을 괴수 장르로 풀어낸‘괴물’의 영어 제목은 숙주란 뜻의 ‘Host’, ‘기생충’은 이와 대구를 이룬다.

'살인의 추억' 현장. 경찰이 갈대밭에서 대대적인 수색을 벌이는 장면은 키가 큰 갈대들 떄문에 전경 역 보조출연 배우들도 키 175㎝ 이상을 섭외했다. [중앙포토]

'살인의 추억' 현장. 경찰이 갈대밭에서 대대적인 수색을 벌이는 장면은 키가 큰 갈대들 떄문에 전경 역 보조출연 배우들도 키 175㎝ 이상을 섭외했다. [중앙포토]

지난해 칸 귀국 후 인터뷰에서 봉 감독은 “제 안에는 불안이나 공포의 감정이 많다. 이걸 영화로 표현하면 서스펜스가 된다”면서 “그 불안이나 공포의 근원은 타인, 집단, 사회, 시스템이다. 그래서 제 영화에 사회나 정치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다”고 했다.

김 저널리스트는 “‘기생충’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하나의 도약”이라 했다. “‘설국열차’ ‘옥자’는 명백히 정치적일 수 있는 이야기를 골라 정치적이지 않게 (장르적으로) 만들려 했다”면서  봉 감독의 주제 전달 방식이 ‘기생충’에선 훨씬 직접적이고 선명해졌다고 설명했다.

20년만에 2번째 감독상 도전 멘데스

'살인의 추억' 현장에서 모니터로 촬영분을 보고 있는 봉준호 감독(앞). 그 뒤로 주연 송강호가 웃고 있다. [중앙포토]

'살인의 추억' 현장에서 모니터로 촬영분을 보고 있는 봉준호 감독(앞). 그 뒤로 주연 송강호가 웃고 있다. [중앙포토]

올해 ‘기생충’과 아카데미 감독상을 겨룰 가장 막강한 경쟁작은 샘 멘데스 감독의 제1차 세계대전 실화 영화 ‘1917’이다. 골든글로브 감독상, 영국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미국 감독조합 감독상 등 굵직한 수상이 잇따른다. 멘데스 감독은 데뷔작 ‘아메리칸 뷰티’로 2000년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단 한 번 올라 수상했고 20년만에 다시 후보에 올랐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펄프 픽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 이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로 세 번째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이번에 수상하면 최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감독상보단 각본상 쪽에 상복이 기우는 분위기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은 1981년 ‘성난 황소’를 시작으로 ‘아이리시맨’으로 9번째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감독상 수상은 2007년 ‘디파티드’가 유일하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조커’로 처음 감독상 후보에 호명됐다.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한국시간으로 10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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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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