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 보느라 내 시간 없네…황혼육아 '개미지옥'될 수도

중앙일보

입력 2020.02.01 09:00

[더,오래] 박영재의 은퇴와 Jobs(63)

조영순(63)씨는 2년째 외손자를 돌보고 있다. 공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맞벌이를 하는 큰 딸은 5년 전에 결혼해 3년 전 자녀를 출산했다. 1년 출산휴가를 마치고 복직을 하려는데, 자녀를 맡길 도우미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시부모님이 계시지만 너무 멀리 계시고 연세도 80세가 넘었기 때문에 육아를 부탁하기에는 무리였다. 조씨는 딸이 각고의 노력 끝에 그 회사에 취업했고, 또 직장생활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잘 알기 때문에 본인이 외손주 육아를 돕기로 했다. 딸 부부는 조씨 아파트 옆 동으로 이사 왔다. 처음에는 좋았다. 딸과도 자주 볼 수 있고, 또 첫 손자를 돌볼 수 있으니 정말 행복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몸이 부치기 시작했다. 새벽 7시에 딸집에 가서 외손자 아침 챙겨주고 딸 부부가 출근하는 것을 돌봐준다. 딸 부부 출근 후에는 본격적으로 외손자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 손자 아침 챙겨 먹이고 씻기고 옷 입혀 9시 30분에 현관 앞에서 어린이집 버스에 태운다. 하지만 등원시켰다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딸집으로 와서 집안 정리도 하고 청소도 하다보면 오전이 후딱 지난다. 외손자 돌보는 것뿐만 아니라 집안일 하는 것도 어느덧 조씨의 몫이 되어 버렸다.

맞벌이를 하는 큰 딸을 도우려 2년째 외손자를 돌보고 있는 조 씨(63). 딸과 자주 보고 손자를 돌볼 수 있어 행복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몸이 부치기 시작했다. [사진 pxhere]

맞벌이를 하는 큰 딸을 도우려 2년째 외손자를 돌보고 있는 조 씨(63). 딸과 자주 보고 손자를 돌볼 수 있어 행복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몸이 부치기 시작했다. [사진 pxhere]

조씨는 일주일에 한번 매주 금요일 오전 11시에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미술을 배운다. 7년째 다니고 있으니 외손자를 돌보기 전부터 시작한 조씨의 유일한 취미생활다. 자연스럽게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이 생기고 이들과 점심도 하고 커피도 마시면서 수다를 떤다. 가끔 여행도 가는 여유가 있는데 외손자를 돌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점심을 먹은 후 외손자 하원시간에 맞춰 급하게 집으로 와야만 했다. 과거에는 백화점 근처에 있는 맛 집을 찾아다니기도 했는데 이제는 바쁜 조씨를 배려해 백화점 안에 있는 음식점만 이용한다. 조씨 입장에서는 고맙기도 하지만 민폐를 끼치는 거 같아 미안하기도 하다.

오후 4시 이후에 외손자가 하원하면 이때부터 조씨에는 초인적인 체력이 필요하다. 침대 위를 날아다니고, 장난감을 집어던지고, 거실을 뛰어다니는 외손자를 상대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딸이 퇴근하면 조씨의 일은 끝난 거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시달리고 지친 모습으로 집에 오는 딸의 모습을 보면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딸이 씻는 동안 저녁을 챙겨주게 되고 딸이 마음 편하게 밥이라도 먹을 수 있도록 외손자를 돌보고, 결국 사위가 퇴근해 부부가 함께 있을 때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조씨는 언제까지 외손자를 돌봐야 할지 막막하고 만일 둘째를 낳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된다. 게다가 올해 30세가 된 아들이 조만간 결혼할 예정인데, 친손자도 당연히 돌봐야 하는 거 아닌가는 생각이 들면서 본인이 빠져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에 떨어진 거 같은 느낌이 든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에서 2018년 발표한 은퇴라이프트랜드보고서에서는 5060세대의 가족과 삶을 5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부모은행’, ‘원격부양’, ‘황혼육아’, ‘더블케어’, ‘동상이몽’인데 ‘황혼육아’가 위 사례자의 경우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기꺼이 황혼육아를 선택할 것이다. 좋은 마음에서 시작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기도 하고 신체에 무리가 오기도 한다. [사진 pxhere]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기꺼이 황혼육아를 선택할 것이다. 좋은 마음에서 시작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기도 하고 신체에 무리가 오기도 한다. [사진 pxhere]

‘황혼육아’는 노후를 바라보고 있는 5060세대가 자녀를 대신해 손주를 정기적으로 돌보고 있는 상황을 말한다. 손주가 있는 부모의 절반(51.1%)이 황혼육아를 경험한 적이 있다. 이들의 황혼육아는 자녀 사랑의 연장선상에 있다. 자녀 부부가 마음 놓고 직장생활을 하게 도와주려고(48.0%) 황혼육아를 선택했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은 자녀가 아이를 전담해 양육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안쓰러워서 도와주고 싶다(16.7%)는 이유였다.

물론 자녀입장에서 손주를 돌보는 부모님에게 약간의 수고비를 주지만, 위 보고서에 따르면 정기적으로 받는 경우는 34.9%에 불과했고, 금액도 평균적으로 70만원이었다. 이는 150만~200만원이 드는 외부 육아 도우미를 고용했을 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에 기꺼이 황혼육아를 선택하는 것이다. 좋은 마음에서 시작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기도 하고 신체에 무리가 오기도 한다. 또한 접촉이 잦아지면서 양육 방식에 대한 차이도 나타날 수 있고,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하면서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황혼육아가 늘어나는 이유는 사회 전반의 제도가 미비하기 때문이다. 2018년에는 손자녀를 돌보는 조부모에게 양육수당을 지급하는 ‘아이돌봄 지원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발의되기도 했고, 일부 지자체에서는 조부모에게 최대 24만원의 양육비를 지급하는 손주돌보미 서비스를 시행하기도 한다. 또 작년에는 서울시 교육청에서 육아를 넘어 교육에도 적극 참여하는 학조부모를 위해 ‘조부모 대상 학부모 교육’을 시범운영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제도가 극히 제한된 사람만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중장년이 필연적으로 겪는 황혼육아에 대해 가능하면 부담하지 말았으면 한다. 하지만 ‘손주가 너무 예뻐서’, ‘자녀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서’, ‘조금이라도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등 여러 이유로 황혼육아를 하게 된다면 그 목적에 맞춰 황혼육아의 범위와 기간을 명확하게 정해야 한다.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 ’어린이집 등원을 챙기는 거까지‘, ’어린이집 하원 후부터 퇴근 때까지’….

또한 부부가 역할을 분담할 필요도 있다. 할머니만 양육을 부담하는 것이 아니고 할아버지도 할빠(할아버지+아빠)의 역할을 하는 것도 방법이다. 섬세한 것은 할마(할머니+엄마)가, 상대적으로 힘을 써야하는 것은 할빠가 담당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국은퇴생활연구소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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