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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꼬르뷔지에가 설계한 집합건물이 강남 아파트 원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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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호 18면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28〉

1980년대 말 독일 유학시절, 베를린 서쪽 끝에 있는 노동자 기숙사에 작은 방을 구했다. 웅장한 베를린 올림픽경기장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창문을 열면 올림픽경기장만큼이나 거대한 아파트가 고만고만한 독일식 주택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었다. 내겐 아주 익숙한 한국의 아파트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위로 치솟은 한국의 아파트와는 달리 횡으로 길게 이어진, 베를린에서는 참으로 보기 힘든 커다란 건물이었다.

“바우하우스는 주거기계 추구해야” #슐레머, 산업사회에 맞는 건축 주장 #노동자 위해 값싼 조립식 주택 지어 #르 꼬르뷔지에, 여기에 집단성 가미 #17층 건물에 ‘옥상정원’도 만들어 #한국 아파트는 두 방식이 합쳐진 셈

나를 찾아왔던 독일 친구는 그 건물을 가리키며 한참을 욕했다. 저 따위 기능주의 건축이 베를린 경관을 망친다는 것이었다. 이 아파트 지역의 자살률이 다른 지역에 비해 현저히 높다고도 했다.

당시 독일에서 ‘기능주의’ 건축에 대한 혐오는 극에 달했다. 그로피우스나 바우하우스에 대한 언급은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오늘날과는 너무 달랐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알았다. 그 건물은 르 꼬르뷔지에의 ‘유니테 다비타시옹(Unité d’Habitation)’이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마르세이유(1952년)에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베를린(1958년)에도 있었던 것이다.

베를린에도 ‘유니테 다비타시옹’

① 바우하우스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 ② 그로피우스가 만든 독일 데사우-퇴르텐 지역의 집단주거단지. ③ 바우하우스 선생이었던 오스카 슐레머의 ‘주거기계’에 관한 메모와 그림. ④ 베를린의 ‘유니테 다비타시옹’. ⑤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선보인 르 꼬르뷔지에. [사진 윤광준·중앙포토], 그래픽=이은영 기자 lee.eunyoung4@joins.com

① 바우하우스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 ② 그로피우스가 만든 독일 데사우-퇴르텐 지역의 집단주거단지. ③ 바우하우스 선생이었던 오스카 슐레머의 ‘주거기계’에 관한 메모와 그림. ④ 베를린의 ‘유니테 다비타시옹’. ⑤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선보인 르 꼬르뷔지에. [사진 윤광준·중앙포토], 그래픽=이은영 기자 lee.eunyoung4@joins.com

한국인의 공간의식에서 아파트는 치명적이다. 바로 이 아파트 건축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설계한 르 꼬르뷔지에의 본명은 샤를 에두아르 잔느레(Charles Edouard Jeanneret)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스 국경 근처의 작은 도시 라쇼드퐁에 있는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이 후 건축으로 관심을 돌려 1907년부터는 유럽 각국을 여행하며 건축 일을 익혔다. 빈에서 아돌프 로스를 만났고, 1909년에는 프랑스에 철근콘크리트 기법을 도입한 오귀스트 페레의 사무실에서 잠시 일했다. 1910년부터  5개월간은 베를린의 페터 베렌스 건축사무소에 있었다. 이 때 그는 이곳에서 일했던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 등과 친분을 맺는다. 이 경험은 후에 르 꼬르뷔지에 건축과 바우하우스의 건축이 일정부분 공유하는 건축철학의 토대를 이룬다.

1917년 이후 주로 파리에 머물던 르 꼬르뷔지에는 1920년부터 ‘에스프리 누보’라는 잡지 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 글을 쓰면서 그는 본명인 ‘샤를 잔느레’ 대신 ‘르 꼬르뷔지에’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자신의 외할아버지의 이름 ‘르 꼬르베지에(Le corbésier)’를 변형한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불어 ‘까마귀(le corbeau)’의 변형인 ‘까마귀 같은 사람(Le corbéausier)’으로 이해했다. 실제로 르 꼬르뷔지에는 자신의 그림이나 설계도에 까마귀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이 까마귀가 이상이 쓴 ‘오감도’의 첫 글자인 까마귀(烏)라는 것이 이상 연구자 김미영의 주장이다.

아울러 이상이 쓴 것으로 여겨지는 ‘현대미술의 요람’(1935년)이라는 글에는 ‘에스프리 누보’라는 제목의 단락이 있다. 이 또한 르 꼬르뷔지에가 참여한 잡지 ‘에스프리 누보’를 차용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김미영은 주장한다. 어쨌든 르 꼬르뷔지에는 이상의 시 ‘오감도’부터 오늘날의 강남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삶과 아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파트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프랑스어로 ‘주거단위’를 뜻하는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독일어 ‘주거기계(Wohnmaschine)’의 르 꼬르뷔지에식 번역이다. 오늘날 ‘주거기계’는 르 꼬르뷔지에가 창안한 개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개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바우하우스의 선생이었던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 1888~1943)였다. ‘주거기계’라면 오늘날에는 왠지 부정적 의미로 다가오지만, 당시만 하더라고 최첨단의 의미가 담긴 개념이었다. 더구나 햇볕도 전혀 들지 않는 ‘힌터호프(Hinterhof)’에 대부분 살고 있는 독일의 도시빈민들에게 기계처럼 뚝딱 만들어지는 싸고 밝고 따뜻한 집은 곧 ‘구원’이었다.

1922년 슐레머는 “바우하우스가 추구해야 할 것은 중세의 대성당이 아니라 주거기계”라고 선언하며 그로피우스에게 도전한다. 이 때의 ‘중세 성당’이란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 설립당시 목표로 했던 건축을 뜻한다(‘바우하우스’는 ‘바우휘테(Bauhütte)’라는 중세 건축조합의 이름에서 나왔다). 바우하우스의 지향점은, 그로피우스가 설정한 중세적 건축이나 수공예가 아니라, 기계생산과 산업사회라는 시대적 변화에 걸맞는 건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슐레머는 ‘건축이란 집을 짓는 것이 아니다. 신념이다’라는 메모와 함께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 주거기계’를 그렸다.

상상처럼 여겨졌던 슐레머의 ‘주거기계’는 바우하우스가 데사우로 이전 한 후 구체적 건물로 구현됐다. ‘데사우-퇴르텐 주거단지(Bauhaussiedlung Dessau–Törten)’ 프로젝트(1926~1928)를 통해서다. 1차 세계대전 후의 경제적 궁핍함을 겨우 벗어나기 시작했던 20년대 중반, 독일의 대표적 공업도시였던 데사우시는 공장 노동자들을 위한 집단 주거단지를 만들어달라고 그로피우스에게 의뢰했다. 전제 조건은 세 가지였다. 조명, 공기, 햇볕. 주거의 필수조건이다. 여기에 노동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싼 집세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로피우스는 데사우 외곽의 퇴르텐에 57~75㎡ 넓이의 집 314개를 지었다. 모두 비슷한 모습의 조립식 주택이었다. 건축비를 현저하게 절약할 수 있었다. 정원이 딸린 따뜻한 집을 갖게 된 노동자들은 감격했다.

바우하우스의 ‘주거기계’는 르 꼬르뷔지에가 후에 구현한 ‘유니테 다비타시옹’과는 크게 달랐다. 베를린에 있는 ‘유니테 다비타시옹’이 17층 높이의 건물에 530가구가 살 수 있게 설계한 고층의 집합주거건물이었지만, 데사우-퇴르텐 주거단지의 집은 각각 독립된 건물이었다. 또한 집집마다 350~400㎡의 정원이 포함돼 있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정원에서 작물을 재배하거나 닭이나 돼지를 키웠다. 반면 르 꼬르뷔지에가 만든 건물의 정원은 옥상에 있었다. 각종 문화활동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옥상정원’은 르 꼬르뷔지에 건축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옥상정원’은 이상의 시에도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다.)

한국은 왜 ‘아파트 단지 공화국’이 됐나

근대 주거형태의 새로운 모습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제시한 바우하우스의 ‘주거기계 단지’와 르 꼬르뷔지에의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수 십 년 후 엉뚱한 곳에서 통합된다. 한국의 ‘아파트 단지’다.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르 꼬르뷔지에의 ‘유니테 다비타시옹’이 바우하우스식의 ‘주거기계 단지’ 방식으로 모여 건설된 것이다.

물론 ‘아파트 단지’는 서구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처럼 대규모로 지어진 경우는 보기 힘들다. 게다가 한국의 아파트는 특이하게도 ‘부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도시 빈민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유럽의 ‘주거기계’가 한국에서는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도입되고 발전한 것이다. 게다가 서구에서는 실패한 기능주의적 집단주거 방식으로 여겨지는 ‘아파트’가 한국에서는 ‘재산축적의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이같은 한국의 아파트 단지에 대한 변명은 매번 ‘땅은 좁고 사람은 많아서’다. 그러나 프랑스의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책에서 한국인들이라면 너무나 당연히 여기는 그 변명이 그렇게 당연한 것은 아니라고 비판한다. 한국만큼 영토가 좁고 인구 밀도가 높은 네덜란드나 벨기에의 경우, 도시로의 인구집중이 아파트 단지와 같은 대규모 집단주거시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유럽의 경우처럼 효율적으로 도로를 내고 그 주위로 3-4층 건물이 이어지는 방식으로 개발할 수도 있었는데, 왜 하필 죄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었느냐는 것이다. 발레리 줄레조의 비판은 타당하다.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라기보다는 ‘아파트 단지 공화국’이라 해야 정확하다. 도시화·산업화 과정에서 ‘아파트’는 충분히 의미있는 효율적 주거방식이다. 문제는 한국의 ‘아파트 단지’다. 아파트 단지는 ‘사는 곳’이 ‘사는 것’이 되어버린 한국적 자본주의의 특별한 현상으로 봐야 한다.

이 독특한 주거방식은 오늘날 한국인의 의식에 여러 형태로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요즘의 이 형편없는 ‘니편’ ‘내편’의 이분법 또한 ‘아파트 단지’의 삶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내 가설이다. 존재와 의식은 항상 공간적 구체성을 갖는다. 공간이 의식을 결정한다! 요즘 내가 박사논문 쓸 때보다도 더 열심히 바우하우스를 공부하고 있는 이유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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