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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네커, 동독에 당신만 남았어…장벽 붕괴 직후 60만 서독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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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호 26면

한스 자이델 재단과 함께하는 독일 통일 30돌 〈5〉

1989년 11월 헬름슈테트-마리엔보른 동서독 경계 검문소에 수천 대에 달하는 동독 트라비자동차들이 서독으로 넘어가려고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사진 귄터 마흐]

1989년 11월 헬름슈테트-마리엔보른 동서독 경계 검문소에 수천 대에 달하는 동독 트라비자동차들이 서독으로 넘어가려고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사진 귄터 마흐]

예전 동독에서는 다음과 같은 농담이 회자됐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서기장인 에리히 호네커가 하루는 베를린을 돌아다녔으나 전혀 인적을 느끼지 못했다. 여기저기를 살펴보다가 장벽에 큰 구멍이 뚫린 것을 발견했는데 그 옆에 놓인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에리히, 이제 당신만 남았어. 인제 그만 불을 끄시지!’ 이 농담은 당시 대규모로 동독을 탈출하는 주민들의 상황을 풍자한 것이다. (호네커가 동독을 가장 마지막에 떠날 것이라는 조롱인 셈이다.)

18~45세 젊은 사람들 대거 떠나 #‘호네커만 남아’ 이주 상황 풍자도 #처음엔 환대했던 서독인들 불안 #콜, 90년 초부터 통일 밀어붙여 #한국도 북측 주민 이주 대비를 #남북한 열린 자세 가져야 통합

몇 주 새 수백만 명 호기심에 서독 방문

서독과 동독이 분단된 시점부터 동독을 떠나는 사람들은 줄곧 있어 왔다. 베를린장벽이 설치됐던 1961년까지 약 400만 명에 이르는 동독 사람들이 분단 독일의 유일한 탈출 경로였던 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넘어갔다. 동독이 베를린장벽을 세우게 된 이유다.

그 이후에는 매년 수천 명의 동독인이 동독 정권의 승인 아래 동독을 떠났다. 매년 차이는 있었지만 평균적으로 1년에 7000명에서 3만 명 정도의 동독인들이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서독으로 향했다. 이는 당시 동독 정권이 체제에 불만을 가진 주민들을 대상으로 운영한 배출구와 같은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남아 있던 사람들도 서독으로 가고자 하는 열망이 강해지는 현상이 생겨났다.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이후 무너질 때까지 총 50만 명의 동독인이 서독으로 넘어갔다. 합법적인 이주자와 불법 탈출자 그리고 제3국을 경유한 탈출자들을 모두 합한 숫자이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직후 수주 동안 수백만에 이르는 동독 주민들이 동독의 자동차인 트라비를 타고 서독에 사는 친척들을 방문했다. [사진 베른하르트 젤리거]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직후 수주 동안 수백만에 이르는 동독 주민들이 동독의 자동차인 트라비를 타고 서독에 사는 친척들을 방문했다. [사진 베른하르트 젤리거]

장벽 붕괴와 함께 자유가 찾아왔다. 장벽이 무너지고 난 후 몇 주 정도의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수백만 명의 동독인이 서독을 방문했으며 2년이 채 되지 않아 거의 모든 동독인이 서독을 방문했다. 대부분은 서독에 대한 호기심에서 방문했으며 처음 서독을 구경한 이후에는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반대로 동독에 대한 서독인의 호기심은 훨씬 작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적지 않은 동독 지역 주민들이 동독을 떠났다. 1989년에 이미 거의 35만 명의 동독 사람들이 서독으로 향했으며 이듬해에는 24만 명의 동독인이 고향을 떠났다. 이들은 대부분 18세에서 45세 사이의 젊은 사람들이었다.

동독을 떠나 서독으로 이주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오랫동안 동독을 떠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동독의 개혁 의지를 신뢰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에 진행되고 있었던 동독에서의 평화혁명이 지속할지도 확실치 않은 점도 있었다. SED의 후신인 민사당(PDS)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으며 동독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라 자처하며 통일 가능성은 기본적으로 배제하는 입장이었다.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서 시위대가 외치는 구호가 ‘우리는 시민이다’에서 ‘우리는 한 민족이다’로 바뀌었지만 당시의 정치적인 전개과정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서독 오버팔츠 바이덴의 동독인 임시 수용소. [사진 노이어 탁]

서독 오버팔츠 바이덴의 동독인 임시 수용소. [사진 노이어 탁]

예를 들면 1990년 1월에 벌어졌던 동독 시민들의 슈타지 본부 난입과 같은 사례가 그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많은 사람이 슈타지가 주민 감시 활동과 관련된 민감한 서류들을 파기하려고 한다는 시도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련의 입장도 불투명했다. 소련이 동독 사태에 개입할 것인가? 동독에는 여전히 50만 명에 이르는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동독 인민군도 불안한 상태였지만 동독 과도 정부의 지휘 아래 놓여 있었다. 1년이 지난 시점인 1991년에 밝혀진 바로는 실제로 고르바초프 정권에 대한 실패로 끝난 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며, 이러한 정보가 꾸며진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이 드러났다.

서독에서는 동독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언제나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동독의 작은 자동차인 트라비를 타고 처음 서독을 방문할 때에는 샴페인과 환호로 동독 사람들을 마음껏 환영했지만 몇 달이 지나자 회의적인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동독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은 서독 사회에 적응하고 동화되는 과정이 필요했으며 직장과 살 집을 찾는 데 있어서 그들은 서독 사람들과 경쟁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특히 통일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했던 사민당의 주요 정치인들은 동독 이주자들을 곧 돌려보내려고 하거나(당시 사민당 총재였던 오스카 라퐁텐) 서독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우선적으로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하이네만 복지부 장관).

중동 난민보다 통일 난민 해결 쉬워

‘서독으로의 대량 탈출, 안정에 대한 위협인가?’란 제목의 1990년 1월 22일자 슈피겔 표지(左),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동독 이주민들이 몰려올 것인가? - 환호 뒤의 후회 - 동독의 불안과 서독의 분노’란 제목이 실린 1990년 2월 19일자 슈피겔 표지(右).

‘서독으로의 대량 탈출, 안정에 대한 위협인가?’란 제목의 1990년 1월 22일자 슈피겔 표지(左),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동독 이주민들이 몰려올 것인가? - 환호 뒤의 후회 - 동독의 불안과 서독의 분노’란 제목이 실린 1990년 2월 19일자 슈피겔 표지(右).

헬무트 콜 정부가, 당시 일반적으로 초반에는 서서히 전개된 이후 분위기가 무르익은 다음에야 접근하게 될 최종 목표라고 여겨졌던 통일을, 1990년 초부터 강하게 밀어붙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분단 상황이 지속할수록 동독 주민들의 서독으로의 이주 움직임이 계속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독은 2차 대전 종전 이후에 1000만 명에 달하는 독일 이주 난민들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여 통합을 이룬 경험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독 주민들의 서독 내 통합은 명백하게 더욱 어려운 과제로 보였을 뿐 아니라 그 숫자 또한 매우 많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2015년부터 발생한 중동 및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온 난민 문제와 비교한다면 그 문화적 격차의 상대적 유사성으로 인해 통일 난민 문제는 해결이 더욱 용이한 사안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경우에는 어떠할 것인가? 이미 한국에는 독일과 비교하여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수만 명에 이르는 북한 이탈 주민들이 입국하여 생활하고 있지만 이들의 한국 내 적응은 언어와 문화 등의 차이로 인해 간단치 않은 측면이 존재한다. 한국의 통일 과정에서 북측 주민들이 대규모로 남측으로 유입될 가능성을 감안한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이는 단지 북한 주민들의 삶의 질을 남측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북한 사람들의 기질을 남측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하는 작업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양쪽이 모두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계속〉

※ 번역 : 김영수 한스 자이델 재단 사무국장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
독일 킬대학 경제학 석·박사, 파리1대학 경제학 석사, 1998~2002년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학대학원 전임강사, 2004~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2007년부터 독일 비텐-헤르데케대학 객원교수. 2002년부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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