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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버스안내양, 어르신 많은 합천에 장날마다 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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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2일 경남 합천군 한 마을 앞에서 버스도우미 김영애(50·여)씨가 어르신을 돕고 있다. 송봉근 기자

22일 경남 합천군 한 마을 앞에서 버스도우미 김영애(50·여)씨가 어르신을 돕고 있다. 송봉근 기자

지난 22일 오전 경남 합천군 삼가면 삼가시장. 2일과 7일 삼가장이 열리는 장터 앞 버스터미널에 서흥여객 소속 농촌버스 한대가 들어왔다. 문이 열리자 왼쪽 가슴에 ‘水려한 합천’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노란 잠바를 입은 김영애(50·여)씨가 활짝 웃으며 “조심히 올라가세요”라고 말하며 버스 주변에 모여 있던 어르신들의 무거운 짐과 보조 보행기 등을 버스 안으로 연신 날랐다. 한 손에 짐을 든 채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부축해 자리로 모셔다드리고 버스비를 받아 요금통에 넣는 모습이 일사불란했다.

합천군 장날 ‘버스도우미’ 시행 #승하차 돕고 짐 옮기고 말동무까지 #안전사고 위험 줄고 어르신들 반색 #이용객 “버스타기 무서웠는데 수월”

순식간에 10여명이 앉은 버스 안은 장터처럼 시끌벅적했다. 김씨가 어르신들에게 무엇을 샀는지, 건강은 어떤지를 묻자 여기저기서 답변이 들려오면서다. 안복상(80)씨는 “짐 든 것 올려 주고, 또 내려주고 그러니 좋지 좋아”라며 연신 김씨의 팔뚝을 다독였다.

지난 1961년 시내버스와 고속버스에 투입됐다가 버스 벨을 누르면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지난 1989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버스안내양’이 합천에 다시 나타났다. 합천군이 지난해 8월부터 어르신들의 승하차를 돕는 ‘농촌 장날버스도우미’ 사업을 도입하면서다.

이날 버스에 탄 오정인(86·여)씨가 “시상(세상) 편하지, 내라주고(내려주고)올리주고(올려주고) 하니”라며 엄지를 치켜세우자 옆에 앉아 있던 배덕순(86·여)씨가 “시골 할매들이 나오고 싶어도 버스를 타기 무서비서(무서워서) 나올 엄두를 못 냈지, 지금은 이리 나온다 아이가”라며 맞장구를 쳤다. 좌석 사이에는 장날 사온 갖가지 제수용품들이 가득했다. 정수영(80)씨는 “여기 다 늙은 사람밖에 없는데 며느리 같은 저 젊은 양반이 있으니 와 안 좋겠노”라고 말했다.

합천 장날버스도우미는 삼가장 뿐 아니라 합천장(3·8일), 초계장(5·10일)에 맞춰 운영된다. 합천군은 4만5000여명의 인구 중에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38%(1만7244명)에 달한다. 특히 17개 읍·면 375개 마을 중 51개 마을은 장날에만 버스가 운행된다. 그동안 버스 타기가 힘들어 외출을 삼갔던 어르신들이 많았는데 버스도우미가 생긴 뒤에는 ‘나 홀로 외출’이 가능해졌다. 버스 운행시간과 안전사고 위험도 크게 줄었다. 버스 기사 이강열(53)씨는 “어르신들은 버스에 오르내리고 자리에 앉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승하차 시 무거운 짐을 들어 안전사고 위험도 많아 늘 애를 태웠는데 그런 걱정이 줄어 운전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애로 사항도 있단다. 일부 어르신들이 도우미를 일꾼으로 여겨 함부로 말을 하고 부려먹을 때도 가끔 있다는 것이다. 김영애씨는 “가끔 속상할 때도 있지만, 어르신들이 장터에서 산 음식을 주거나 연신 고마움을 표할 때는 이 일을 잘했다는 만족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정재윤 경제교통과 계장은 “현재 1명인 버스 도우미를 2월까지 2명으로 늘리고 향후 4명까지 늘려 운영할 계획이지만 젊은 사람 중에 지원자가 많지 않아 인력 충원에 애를 먹고 있다”고 말했다.

위성욱 기자 w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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