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최준호의 사이언스&

나의 운명은…사주팔자 말고 DNA 검사도 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

나는 어떤 인간이며,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요즘은 유독 ‘나’가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그 때문일까. ‘미아리’로 대표되는 철학관·점집의 연중 최고 대목이 정초라고 한다.

운동능력·주량·노화 등 알수 있어 #올해부터 DTC 검사 56개로 확대 #미성년자 검사 금지는 어불성설 #바이오산업 이미 국경 없는 시대

태어난 연월일시(年月日時), 즉 사주팔자로 나의 과거·현재와 미래를 알아보는 게 ‘동양철학’이라면, 유전자 검사는 생명과학에 기반을 둔 ‘나’를 찾는 작업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 속 유전자에는 생물학적 ‘나’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 유전자를 제대로 분석할 수만 있다면, 나의 본질과 이를 토대로 미래 가능성까지 어느 정도 헤아려 볼 수 있다.

미국 콜로라도 공공보건환경부 산하 연구소에서 DNA 추출 작업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미국 콜로라도 공공보건환경부 산하 연구소에서 DNA 추출 작업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1998년에 개봉한 과학소설(SF) 영화 ‘가타카’는 그런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영화는 병원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간호사는 신생아 유전자 검사를 통해 “신경계 질병에 걸릴 확률 60%, 우울증 확률 42%, 집중력 장애 확률 89%, 심장질환 확률 99%, 조기 사망이 가능하고, 예상수명은 30.2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느낌도 생경한 2020년이다. 인류는 이미 충분히 미래에 살고 있다. 30억 쌍에 이르는 인간의 모든 DNA 염기 서열을 해독한 인간 지놈(유전체) 프로젝트는 이미 2003년 완성됐다. 이제는 500달러도 채 되지 않는 비용으로, 단 1~2주 만에 한 인간의 모든 DNA를 해독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이를 분석하면 기술적으로는 영화 가타카의 장면처럼 한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알아낼 수 있다. 여기서 굳이 가능성이라 하는 이유는 DNA에 새겨진 것이 ‘100% 그렇다’고 얘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주팔자로 보는 운명이 모든 것이 정해진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과 무척이나 닮은꼴이다.

사이언스& 1/23

사이언스& 1/23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는 이미 민간 유전자 분석 시장이 활짝 열렸다. 혈액도 아닌 침 몇 방울만 택배로 검사기관에 부쳐주면, 내가 무슨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큰지, 나의 조상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생명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키·지능·수명·눈동자 색·머리카락 색 등 ‘일반적’인 유전정보까지 다 알 수 있다고 한다.

한국도 2020년은 생명공학의 현재와 미래에 새로운 획을 긋는 한 해가 될 듯하다. 지난해 12월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는 비의료기관에서 하는 소비자직접의뢰(DTC·Direct To Consumer) 유전자 검사 항목을 56개 항목에 대해 2년간 임시허가 방식으로 검사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 위원회는 또 DTC 유전자 검사 서비스를 항목을 확대하도록 권고했다.

국가별 DTC 검사 허용 항목

국가별 DTC 검사 허용 항목

허용되는 유전자 검사는 비타민C농도, 색소침착, 피부노화, 남성형 탈모, 모발굵기, 카페인대사, 중성지방농도, 체질량지수, 콜레스테롤, 혈당, 혈압, 비타민D농도, 코엔자임Q10농도, 마그네슘농도, 아연농도, 철 저장 및 농도, 칼륨농도, 칼슘농도, 아르기닌농도, 지방산농도 등이다.

근력운동 적합성, 유산소운동 적합성, 지구력운동 적합성, 근육발달능력, 단거리질주능력, 발목부상위험도, 악력, 운동 후 회복능력, 기미·주근깨, 여드름 발생, 피부염증, 태양노출 후 태닝반응, 튼살·각질, 원형탈모, 식욕, 포만감, 단맛 민감도, 쓴맛 민감도, 짠맛 민감도 등도 유전자검사로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알코올대사, 알코올의존성, 알코올홍조, 와인선호도, 니코틴대사, 니코틴의존성, 카페인의존성, 불면증, 수면습관·시간, 아침형·저녁형인간, 통증민감성, 퇴행성관절염증감수성, 멀미, 비만, 체지방률, 요산치, 조상찾기 등도 있다. 개인이 타고난 유전자를 해독하면 이런 분야에 대한 기질·민감성을 알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모든 관련 기업이 이런 서비스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2월부터 11월까지 진행된 인증제 시범사업을 통과한 마크로젠·이원다이애그노믹스·테라젠이텍스·랩지노믹스 등 4개 민간 유전자검사기관에서만 일정 비용을 치르고 다양한 유전자 검사를 의뢰할 수 있다.

급증하는 글로벌 유전자 검사 시장

급증하는 글로벌 유전자 검사 시장

DTC와 별도로 의료기관, 즉 병원에서는 치매와 유방암(브라카 유전자)·지능·장수·폭력성 등 보건복지부에서 생명윤리법 시행령(제20조)을 통해 금지하고 있는 항목을 제외한 질병 가능성에 대한 진단을 해주고 있다.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인다면,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질병 예측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56개 항목에 대한 DTC 유전자 검사는 반쪽짜리라는 비판이 많다.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행정예고안에 따르면 미성년자는 DTC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없다.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섣불리 장래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56개 항목 중 단거리 질주 능력과 같은 운동 적성 검사는 운동을 시작하는 초·중학생이 받아야 의미가 있다. 가야 할 길이 정해진 성인이 된 뒤에 관련 DNA 검사를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보건복지부 DTC 시범사업을 주관한 DTC인증심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66%의 소비자가 암과 질병 등의 분야에 대해 DTC 검사 항목 추가를 원한다고 답했다.

이제 바이오산업에 국경은 사라지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하는 서비스를 한국인도 저렴한 비용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생명윤리 관련 규제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안방규제가 역차별을 불러일으켜 K-바이오산업의 싹을 자르는 일은 할 수 있다는 걸 결정 권한을 손에 쥔 사람들은 명심할 필요가 있겠다.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