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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그날의 총성…김재규 몰입 연기한 이병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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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2일 개봉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을 연기한 배우 이병헌. [사진 쇼박스]

22일 개봉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을 연기한 배우 이병헌. [사진 쇼박스]

“그때 난 어린애였고 TV에서 대통령 사진이 계속 나왔죠. 길에선 소복 입은 할머니들이 통곡하고…. ‘나라에 뭔가 큰일이 생겼구나’ 했던 기억이 나요.”

최후 40일간 권력암투 중정부장역 #머리카락 매만지는 습관까지 연구 #“정치 잘 모르지만 인간 갈등에 흥미”

1979년 10월 26일 서울 궁정동의 총성은 배우 이병헌(50)에게 흑백 뉴스 이미지로 남아있다. 41년 뒤 스크린에서 그는 시바스 리갈 위스키 병을 앞에 둔 18년 장기 집권 대통령을 독일제 권총으로 쏜다. “혁명의 배신자로 처단한다”는 말과 함께.

22일 개봉하는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은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이 1인자 ‘박통’(이성민)에게 총구를 겨누기까지 40일 간 행적을 더듬는 영화다. 대통령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곽도원) 등의 에두른 이름들이 ‘픽션’임을 강조하지만 10·26 사태 등 실화가 바탕임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엔딩 크레딧 직전엔 내란목적살인죄로 법정에 선 김재규의 최후 진술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의 수사 내용 발표가 육성으로 흐른다. 총선의 해에 나온 영화인 만큼 정치적 해석의 여지가 없지 않다.

하지만 이병헌은 “난 정치를 잘 모르고 그런 쪽에 지식도 많지 않다”고 했다. 이번 영화는 “드라마틱한 상황에서 인간관계와 심리 갈등에 흥미를 느껴” 참여했다고 털어놨다. 지난 16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다. 그가 우민호 감독과 작업한 것은 700만명을 끌어들인 청소년관람불가 잔혹 느와르 ‘내부자들’(2015)에 이어 두 번째다.

반전 없는 결말까지, 113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이 영화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은 건 베테랑 배우들이다. 특히 이병헌은 권력의 최측근 자리를 경쟁하는 2인자의 불안과 분노를 계량스푼처럼 정밀하게 조절했다. “각하,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를 반복하던 김 부장은 섭씨 99도까지 인내하다 100도가 되는 순간 끓어 넘친다.

‘남산의 부장들’의 이병헌. [사진 쇼박스]

‘남산의 부장들’의 이병헌. [사진 쇼박스]

실존 인물에 부담은 없었나.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드라마틱하고 큰 사건 아닌가. 시나리오 안에서 그 인물이 가진 심리 상태와 미묘한 감정들에 최선을 다해 표현하고 몰입하자고 생각했다.”

김재규라는 문제적 인물에 몰입하려 관련 영상 자료를 수없이 돌려보고 생존 인물들의 증언을 한 다리 건너 접했다고 한다. 투박한 ‘된장 영어 발음’ 구사는 “당시 군 출신 엘리트 남성 느낌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극 중 자주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정돈하는 모습도 법정에 선 김재규에게서 힌트를 얻었단다.

“평소 정갈하게 가르마 타서 포마드를 발랐던 사람이 수감 생활로 흐트러진 머리에 예민해 하는 모습이었다. 영화에선 곽 실장과 한바탕 몸싸움 후에도 머리카락부터 추스르는 식으로 표현했다. 꾹꾹 감정을 누르다가 욱할 땐 활화산처럼 터지는 인물이다.”

영화는 1990년부터 2년 2개월 간 한 일간지에 연재된 동명의 취재기를 사료로 했다. 선후배 관계였던 김형욱-김재규를 친구이자 ‘혁명 동지’로 설정하는 등 가공도 거쳤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파리 유인 암살사건은 여러 ‘설’ 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그리고 가장 끔찍한) 걸 기반으로 했다.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부담이 있을 법한데.
“정치를 잘 모르고 그런 쪽 지식도 많지 않다. 사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도 ‘내부자들’도 사람들이 그렇게 정치적으로 볼 줄 몰랐다. 그냥 극 중 인간의 관계와 감정에 끌려서 (출연을) 결정할 뿐이다. 이 영화도 정치 이야기라고 보지 않는다. 서로 시기하고 충성 경쟁하고 1인자·2인자 간 갈등하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얘기 아닌가. 찍으면서 우리끼리 그렇게 자화자찬했다(웃음).”
1979년 11월 7일 현장검증을 하는 김재규. [중앙포토]

1979년 11월 7일 현장검증을 하는 김재규. [중앙포토]

영화에서 비밀 코드로 등장하는 ‘이아고’는 질투와 배신을 주제로 한 셰익스피어 작품 ‘오셀로’의 등장인물이다. 실제 ‘배신’이란 키워드는 영화를 통틀어 혁명이라 믿은 대업의 자멸 과정에서 종종 강조된다.

대통령의 삽교천행 헬기에 자리를 얻지 못해서, “탱크로 100만, 200만 명 밀어버리자”고 부추기는 꼴을 못 참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하라던 주군의 변심에 좌절한 김 부장의 폭주는 역사를 뒤바꾼 총성으로 이어진다. 그간 드라마, 재현극, 영화를 통해 숱하게 되풀이된 장면이지만 이병헌의 기쁜 듯 슬픈 듯 멍한 표정은 백 마디 말 이상의 혼돈을 압축한다.

“가장 존경하고 사랑한 어떤 인물의 피를 본다고 생각해보라. 그 피에 미끄러지고 양말은 온통 피에 젖어 있고…. 어떤 결단·집념보단 그런 감정에 집중했다. 영화 찍기 전부터 감독님과 얘기한 게 역사에서 미스터리로 남은 것은 영화에서도 미스터리로 남기자고 했다. 끝난 후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한다.”

차기작은 한재림 감독의 영화 ‘비상선언’. 아카데미의 남자 송강호와 함께한다. 둘의 만남은 ‘공동경비구역 JSA’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밀정’에 이어 네 번째다. 연내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히어’(HERE)도 예정돼 있다.

“연기란 게 누군가 찾아줘야지 할 수 있는데 계속 노력해서 그런 위치를 유지하는 게 어려운 일 같다. 10년~20년 후 일은 모르겠지만, 배우생활을 계속한다면 ‘그 사람이 나오는 작품이라 보고 싶다’ 할 수 있는 배우였으면 좋겠다.”

1시간 인터뷰 말미, “혹시 정치 제안받은 적 있나?”고 물었다.

“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그의 동공이 전구처럼 커졌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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