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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빈의 새해 첫 주문 “적당주의 버려라, 이러다 일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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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신동빈

신동빈

분위기는 무거웠고 발언 수위는 높았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사장단 앞에서 작심한 듯 독한 말을 쏟아냈다.

롯데 사장단·임원 100여명 소집 #“경제 상황 과거 위기와 완전 달라 #성장은 커녕 생존 어려울 수도” #전례없는 강경 발언, 만찬도 취소

16일 롯데지주에 따르면 롯데그룹은 전날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에서 정례 사장단 회의인 ‘2020 상반기 롯데 VCM(밸류 크리에이션 미팅)’을 개최했다. 신 회장을 비롯해 계열사 사장단, BU(사업단위)와 지주 임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롯데는 2018년부터 매년 두 번 VCM을 연다.

이 자리에서 마지막 순서로 발언한 신 회장은 “오늘은 듣기 좋은 이야기는 못 할 것 같다”라고 운을 뗐다. 이어 “롯데 성장의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는 유통과 화학 부문의 실적이 하락했다. 내부에서 ‘잘 되겠지’ 하는 적당주의로 이대로 가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롯데 관계자는 “(신 회장이) 수익이 나지 않는 사업은 모두 정리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며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 아무도 입을 떼지 못했다”고 전했다.

신 회장은 “현재와 같은 변화의 시대에 과거의 성공 방식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며 “기존의 성공 스토리와 위기 극복 사례, 관성적인 업무 등은 모두 버리고 우리 스스로 새로운 시장의 판을 짜는 게임 체인저가 되자”고 말했다. 연간 경제 성장률이 5~6%였던 시절에 통하던 방식을 붙잡고 위기를 돌파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지적이다.

신 회장은 “현재의 경제 상황은 과거 우리가 극복했던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와는 완전히 다르다”며 “저성장이 뉴노멀(새로운 표준)이 된 지금,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지속 성장이 아니라 기업 생존이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룹 유통 사업의 핵심인 롯데쇼핑은 2017년 이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악재 등으로 부진했다. 지난해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의 직격탄에 온라인 쇼핑의 공격까지 받았다. 한때 연간 1조원에 달했던 롯데쇼핑 영업이익은 3년 새 절반 수준까지 감소했다. 롯데케미칼은 석유화학 시장의 불황으로 지난해 순이익이 1조원에 못 미칠 것으로 추정된다. 그룹의 ‘양 날개’인 유통·화학은 올해도 고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자 신 회장의 위기감이 더욱 고조된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신 회장은 “롯데 그룹은 많은 사업 분야에서 업계 1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성장해 왔다. 오늘날도 그런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적당주의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재차 강조했다. 또 “모든 직원이 ‘변화를 반드시 이뤄내겠다’‘목표를 반드시 달성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열정과 끈기로 도전해 나가는 ‘위닝 컬처(이기는 문화)’가 조직 내에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롯데 관계자에 따르면 그동안 VCM이나 공개 석상에서 신 회장이 이 정도의 강한 수위로 말한 전례가 없다. 보통은 전담 연설문 작성자가 메시지를 정리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신 회장이 직접 자기 생각을 정리해 말했다고 한다.

롯데 사장단은 이날 예정된 저녁 식사도 취소하고 해산했다. 한 관계자는 “평소와 달리 신 회장의 표정이 잠깐이라도 풀리지 않아 분위기가 비장했다”며 “이런 직접적이고 강력한 시그널(신호)이 나왔으니 올해는 죽자사자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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