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다 키운 뒤 공부해 박사 됐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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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그동안 아이들 공부시키느라 고생이 많았으니 이제 당신이 그토록 하고 싶어했던 공부를 해보는 게 어떻겠소."

남편이 던진 이 한마디에 용기를 얻은 김성희(54)씨가 15일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영어영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한국과 영국 신문에 나타난 신체 은유 표현에 대한 비교 연구'. 한국의 중앙일보와 영국 권위지 중 하나인 가디언의 웹사이트에서 5000개 이상의 예문을 수집, 이 중에서 1500개의 은유적 표현을 비교.분석한 내용이다. 이 논문에서 김씨는 한국어와 영어에서 '피'와 '뼈'라는 단어가 갖는 은유적 차이점과 유사점을 날카롭게 분석해 심사위원들의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런던대 정경대학원과 런던대에 재학 중인 딸과 아들을 뒷바라지했다. 그녀가 옥스퍼드대 석사과정에 입학한 것은 2001년. 두 자녀의 교육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거의 힘이 빠져 이제는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남편인 서울대 의대 엄융의 교수와 자녀들의 성원으로 그동안 미뤄왔던 학업에 뒤늦게 뛰어들었다. 옥스퍼드대 대학원에 진학한 것이다.

그녀는 매일 새벽 5시 옥스퍼드 엑서터칼리지 도서관으로 등교했다. '반지의 제왕' 저자인 J R R 톨킨스가 공부했던 이 도서관의 수위 아저씨들이 "도대체 잠은 언제 자느냐"는 말을 자주 할 정도로 하루도 빠짐없이 학업에 몰두했다고 한다.

정치.경제.미디어 세미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요가와 명상으로 건강을 다져 20대 동료 학생들에게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결코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졸업 후 투자은행인 골드만 삭스에 다니며 어머니의 학비를 지원해준 딸의 도움도 큰 힘이 됐다고 했다.

만학도 김씨가 공부만 열심히 한 것은 아니었다. 젊은 학생들처럼 교내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옥스퍼드대 한국사무소 대표로 한국인 대변인 역할을 도맡아 해냈다.

이 일을 하면서 중국에서 옥스퍼드로 유학온 기자.교수.외교관.공무원.학생들과 친분을 쌓은 것이 인연이 돼 '옥스퍼드 중국 프로젝트' 대표도 맡았다. 지난해 12월엔 중국은행 간부 35명의 옥스퍼드대 연수프로그램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앞으로 전공인 영문학 공부와 함께 중국 관련 연구도 계속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김씨는 "옥스퍼드에서의 공부한 5년이라는 시기는 젊은이들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그들과 어울려 잘 지낸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며 "요즘은 아들.딸들을 공부시킨 뒤 엄마가 공부하는 시대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실제 영국에 자신과 같은 아줌마 학생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한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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