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사관, 즉시 번역 → 본국 전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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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실패했다고 말하면 안 되나"고 한 노무현 대통령의 25일 발언은 주한미대사관에서 영어로 번역돼 바로 국무부에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워싱턴의 한 외교소식통은 이날 "영어로 번역된 문장을 봤는데 한국 말보다 더 자극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며 "그것을 읽은 미국인이라면 기분이 좀 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국무부가 이 발언을 놓고 한국 정부에 이러쿵저러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아직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국무부나 주한 미 대사관은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고 있다. 워싱턴의 주미 대사관 관계자는 "노 대통령의 발언과 관련해 미국 정부 측이 우리에게 전달한 반응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국무부가 노 대통령의 발언을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겠느냐"는 질문에 소식통은 "외국 정상들의 중요 발언은 통상 미 대통령에게 보고되지만 이번의 경우에도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답했다.

부시 행정부는 2004년 11월 노 대통령의 'LA 발언'에 직접 반응을 보인 경우를 제외하곤 지금까지 노 대통령의 어떤 말에도 무대응으로 일관해 왔다. 당시 노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LA에 들러 "핵이 자위 수단이라는 북한 주장에 일리가 있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미 국무부는 "노 대통령의 연설에는 우리가 한국 고위관리들과 가까운 장래에 (북핵 문제를 놓고) 토론을 하길 바라는 요소들이 있다"는 논평을 냈다. 표현은 아주 외교적이었지만 거기엔 노 대통령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후 노 대통령은 미국을 자극하는 말을 여러 번 했으나 미국 정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 노 대통령이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를 겨냥해 "북한이 달러를 위조했다는 증거를 (미국이) 보여주지 않으면서 북한에 장부부터 보여 달라는 것이다. 선참후계(先斬後啓.먼저 처형하고 나중에 알림)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을 때도 미국은 잠자코 있었다.

미국이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까닭에 대해 다른 소식통은 "국내 정치적 계산을 깔고 말하는 듯한 노 대통령의 발언에 반응을 보임으로써 불필요한 논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게 미국의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미국 집권층 일각에선 노 대통령의 화법을 '아마추어리즘의 발로'라며 무시하는 게 최선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국 외교관은 "노 대통령의 말은 부시 대통령과는 다른 대북관이 있다는 걸 뜻한다"며 "9월 워싱턴에서 만날 두 정상이 인식 차를 얼마나 좁히느냐가 향후 한.미관계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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