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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과 혁신에 대한 오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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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전영선 기자 중앙일보 팀장
전영선 산업1팀 차장

전영선 산업1팀 차장

지난 연말 눈길을 끈 파격적 재계 행사가 있었으니 바로 SK이노베이션의 ‘추리닝 송년회’ 다. 대표이사 이하 140여 명이 알록달록한 트레이닝복을 맞춰 입었다.

40~50대 임원이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빨강·파랑·분홍·보라색 ‘스키노맨(SK이노베이션과 맨의 조어)’ 옷을 입고 회사가 새로운 관점 시도를 통해 ‘딥체인지(근원적 변화)’를 하겠다는 의지를 공표했다. 평소 다가가기 어려운 상사가 권위를 내려놓고 파격적인 도전을 했다는 게 자체 평가다.

젊은 직원에 다가가겠다는 고위직의 노력을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는 없다. 다만 궁금하다. 리더가 이런 종류의 파격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굳이 단서를 찾아보자면, 이날 보라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이 연단에 올라 선보인 스키노맨 사행시가 있다. ‘스: 스스로의 행복, 키: 키워가는 행복, 노: 노력하는 행복, 맨: 맨(만)들어가는 행복’.

행복 경영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최근 거듭 강조하고 있는 키워드다. 파격적인 옷을 입은 리더의 핵심 메시지는 지극히 얌전했다. “나 좀 놀 줄 알아”라고 주장하며 선생님 말씀 잘 따르는 모범생 같달까.

노트북을 열며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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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굳이 격식을 깨뜨리는 이유는 단순히 날 잡고 놀아보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파격은 자주 오인된다. 메시지가 얄팍하면 공허해질 게 분명한데도 형식 깨기 위한 형식 깨기가 반복된다. 정부의 여름 반바지 출근이나 기업 이색 송년회 같은 이벤트가 어색해지는 이유도 같다.

SK이노베이션 임원이 기왕 파격적인 옷을 입은 김에 진짜 솔직한 메시지를 전달했다면 어땠을까. 예컨대 지극히 추상적이라 SK 직원조차 ‘뭘 어쩌라는 것이냐’고 되묻는다는 행복 경영에 대해 고위 리더가 날카로운 시각을 곁들여 해설했다면, 꽤 파급력이 있는 행사가 되었을 것이다.

기업과 한국 사회에서 파격만큼 오해받는 또 하나의 단어가 혁신이다. 혁신하자는 구호는 넘치는데, 왜 혁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적다. 올해는 유독 혁신의 실마리를 찾겠다면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진행 중인 ‘CES 2020’을 찾은 한국 기업인이 많다고 한다.

무려 390여 개 업체·단체가 등록했고 1만여 명이 몰려갔다. 미국과 중국에 이어 가장 참가자가 많은 나라다. 심지어 서울시와 경기도 등 지방자치단체까지 고액의 참가비와 체류비를 감수하고 ‘혁신 원정대’에 합류했다. 모두 혁신, 그게 무엇이건, 에 목말라 있다는 방증인데 부디 목표는 있는 원정이길 바란다.

전영선 산업1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