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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전 부총리가 해야 할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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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부가 대통령 소속으로 곧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지원위원회'를 둔다고 한다. 여론 수렴, 갈등 조정 등 '대내 협상'을 위한 기구다.

이런 조직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한.미 FTA에 대한 국민적 관심(특히 비우호적인)을 반영한다. 옥상옥에다 위인설관(爲人設官)이라고 시비를 걸 수도 있지만 이왕 두기로 했으니 확실히 움직이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위원장으로 내정된 한덕수 전 경제부총리가 꼭 챙겨야 할 일이 있다.

우선 김종훈 협상 수석대표를 각종 토론회나 공청회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또 무슨 자료 챙겨 와라, 회의에 나오라는 등의 주문도 일절 하지 말아야 한다. 상전이 되지 말라는 얘기다.

대미 협상 창구인 김 대표는 대내협상까지 맡고 있다. 협상전략을 세우는데도 시간이 빠듯한 그가 외부 행사에 이리저리 불려다닌다. 하루 세 탕이나 뛰는 날도 있다. 한 번에 대략 두 시간, 오가며 길에 뿌리는 시간을 더하면 하루가 휙 저문다.

미국의 웬디 커틀러 수석대표는 어떤가. 협상 외의 행사엔 얼굴을 비치지 않는다. 언론 브리핑도 최소한으로 한다. 1차 협상 때는 유선으로 딱 한번 인터뷰를 했다. 서울에 와서는 한국 측 요청으로 기자회견을 두 번 한 게 전부였다.

물론 미국 내의 관심이 우리처럼 크지 않으므로 두 사람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협상 대표에게 여론 설득의 짐까지 지우는 건 비정상적이다. 여론 플레이를 한다고 상대가 시비를 걸어올 판이다. 이 짐을 위원회가 떠맡아줘야 한다.

둘째, 장관들의 입단속을 하는 일이다. 이미 국무총리와 일부 장관은 협상을 언제든지 중단할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 이들이 한.미 FTA에 늘 삐딱했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줄곧 찬성하다 돌출적으로 김 빠지는 말을 하니 더 문제다. 그 뒤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또 FTA를 지지한다. 혹시 결렬될 때를 의식해 한마디 걸쳐놓은 것이라면 비겁한 면피주의다.

이런 태도가 협상 실무자들에겐 큰 영향을 준다. 협상엔 여러 부처의 공무원들이 참가한다. 이들은 실질적 인사권자의 언동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장관이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 실무자들은 책임질 일을 일단 피하는 법이다. 경제부처의 한 공무원은 "별것 아닌 개방 요구에 신경질적으로 대응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미 영향이 나타난 셈이다. 그럴수록 협상은 농성전 벌이듯 수세로 흐르기 쉽다. FTA는 지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얻어내려고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위원회 명의로 한.미 FTA에 딴죽을 거는 장관에게 즉각 경고를 해야 한다. 말 실수에도 주저 없이 '옐로카드'를 꺼내들어야 한다. 그 기록을 모아 인사에 반영하는 것도 방법이다. 언로(言路)를 통제하자는 게 아니다. 정부 내 엇박자를 막자는 것이다. 이게 토론회 백 번 여는 것보다 협상에 더 도움이 된다. 어쭙잖게 국민을 설득하기 앞서 집안 단속부터 하라는 뜻이다.

셋째, 쉽지 않겠지만 위원장은 '결사대장'이 될 각오를 해두는 게 좋다. 이유는 간단하다. 협상이 깨지면 위원회는 존재 이유를 잃고 공중에 붕 뜨게 된다. 협상 타결 후 국회 비준을 얻지 못하면 최악이다. 국민을 설득하지 못했다며 책임을 뒤집어 쓰기 십상이다. 사무국 공무원들은 경력에 흠이 날 수도 있다. 따라서 위원장이 앞장서 초장부터 죽자 살자 뛰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임 안 지려는 장관에겐 모질게 굴 줄도 알아야 한다. 점잖게 원로 노릇이나 하면 되레 짐이 된다. 그런 면에서 부총리 때보다 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문제는 위원장이 그럴 만한 권한을 확보하느냐다. 정부가 한.미 FTA를 성사시킬 진정한 의지가 있다면 그런 권한을 줄 텐데 두고 볼 일이다.

남윤호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