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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편집국장 레터] 빚, 무서운 겁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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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호 면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중앙SUNDAY 편집국장 김종윤입니다. 지난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 대비)이 0%대인 0.4%에 그쳤습니다. 물가 상승 폭이 둔화했다는 건 경기가 침체의 바닥에서 헤맨다는 뜻으로 봐야 합니다.

그동안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대였던 적은 총 세 차례 있었습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메르스 사태가 발생한 2015년, 그리고 지난해입니다. 앞의 두 번은 모두 태풍급 외부 충격이 가해지면서 경기가 크게 요동친 경우입니다. 2019년은 큰 외부 충격이 없었는데도 물가 상승세가 둔화했습니다.

소비자물가 12월

소비자물가 12월

공급 측면과 수요 측면 모두에 원인이 있습니다. 농수축산물 및 석유류 가격 하락과 건강 보험 보장성 확대 등 공급 측면에서 물가 상승을 꺾는 요인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경기침체가 본격화하면서 수요 부진에 물가가 뛰지 않았다는 분석도 만만찮습니다.

정부는 공급 요인 때문에 물가 상승 폭이 줄었다는 데 무게를 두지만, 학계 일부에서는 수요 부족이 물가 상승세를 꺾은 주요인으로 봅니다. 이미 디플레이션 초입에 들어갔다고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소비자 물가 상승 폭이 줄어드는 정도가 아니라 물가가 하락하면서 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수 있다는 겁니다.

디플레이션이 오면 가계와 기업은 소비와 투자를 늦춥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이 내려가는데 굳이 돈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이는 소비 위축, 생산 부진이라는 악순환을 부릅니다. 경제는 장기 침체의 덫에 빠지게 됩니다.

지난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대인 0.4%에 그쳤다. 뉴스1

지난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대인 0.4%에 그쳤다. 뉴스1

디플레이션 시대에는 채무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빚 상환 부담을 더 짊어져야 합니다. 물가가 오르건 내리건 관계없이 빚은 명목 금액으로 고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물가가 떨어졌는데도 빚의 규모는 변화가 없으니 실제 갚아야 할 빚은 늘어난 셈입니다. 과다한 빚과 디플레이션이 결합하면 파국입니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대가 그랬습니다.

우려스러운 건 저물가가 지속하는 가운데 집값 거품이 터지는 상황입니다. 서울 집값에 이상 징후가 뚜렷합니다. 한양대 하준경 교수가 KB국민은행 자료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지금 서울 주택의 중간가격은 7억원 수준입니다. 이에 반해 가구의 중간소득은 연 5000만원대입니다. 소득 대비 집값이 13.8배나 됩니다. 런던(8.3배), 뉴욕(5.5배), 싱가포르(4.6배)보다 서울 부동산 시장이 과열이라는 걸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집값을 밀어 올린 핵심 원인의 하나가 '빚 내서 집 사기' 풍조였습니다. 여유 자금을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은데다 지금껏 투자 수익률이 높았던 부동산 시장에 돈이 몰린 건 당연한 이치죠. 한국은행의 분기별 은행권 가계대출 잔액을 보면 2018년 4분기에 713조원이었던 가계 대출 잔액이 2019년 1분기에는 718조원에 그칩니다. 하지만 2분기 들어 가계 대출이 다시 증가하면서 732조원을 기록했고 3분기에는 758조원을 돌파했습니다. 지난해 집값은 하반기부터 뛰었습니다.

정부가 대출 규제의 끈을 바짝 조이고는 있지만 이미 가계 부채는 위험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특히 총 가계부채에서 50대가 보유한 부채의 비중이 35%로 가장 큽니다.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50대가 가장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건 위기 신호입니다.

은퇴 이후에 소득이 줄면 빚 갚을 능력이 떨어집니다. 이때 부동산 거품이 꺼져 가격이 폭락하면 부채는 악성이 되면서 금융 시장도 휘청거릴 수 있습니다. 올해 한국 경제 최대 과제는 부채 관리입니다. 경기 침체 속에 빚 부담이 늘면 가계는 벼랑 끝에 몰릴 수 있습니다. 부동산 가격도 경제의 기본 체력과 괴리돼 무한정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빚, 무서운 겁니다. 빚, 늘려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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