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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논산→전주 100㎞ 돌아 노송동에 돌아온 '천사 성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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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완산경찰서 김영근(오른쪽) 형사과장이 2일 오전 11시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를 찾아 지난달 30일 도난당했다가 되찾은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 6016만3210원이 든 A4용지 상자를 최규종 노송동장에게 전달하고 있다. [사진 전주시]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한 직원이 2일 오전 주민센터에서 지난달 30일 도난당했다가 경찰이 되찾은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을 세고 있다. 이날 성금을 전달하러 주민센터를 찾은 김영근(제복) 완산경찰서 형사과장과 최규종 노송동장 등이 지켜보고 있다. [사진 전주시]
전주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을 계산한 종이. 6016만3210원이다. [사진 전주시]

충남 출신 30대 2인조가 빼돌린 전주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 6000만원이 사흘 만에 애초 기부 대상인 노송동주민센터로 돌아갔다.

경찰, 회수한 성금 주민센터에 인계 #'얼굴없는 천사' 기부금 6000여만원 #충남 출신 2인조, 지난달 30일 훔쳐 #직원들, 범인 잡혀 안도하는 분위기 #"상심한 천사 기부에 회의들라" 걱정

2일 전북 전주시에 따르면 전주 완산경찰서는 이날 오전 11시 절도범들에게 회수한 '얼굴 없는 천사' 성금 6016만3210원을 노송동주민센터에 전달했다.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20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남몰래 기부해 온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이 전주→논산→전주 100㎞를 돌아 해를 넘겨 원래 목적지에 도착한 셈이다. 경찰은 '얼굴 없는 천사'가 성금 소유권을 주민센터에 넘긴 것으로 봤다. 이 사건을 해결한 김영근 완산경찰서 형사과장이 직접 주민센터를 찾아 최규종 노송동장에게 성금을 건넸다.

논산 지역 선후배 사이인 A씨(35)와 B씨(34)는 지난달 30일 오전 10시 7분쯤 '얼굴 없는 천사'가 주민센터 뒤편 천사공원 내 '희망을 주는 나무' 밑에 두고 간 성금 6000여만원을 상자째 차량에 싣고 도주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전주지법 최정윤 판사는 1일 "도주 우려가 있다"며 두 사람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들은 범행 당일 오후 2시 25분과 2시 40분쯤 각각 충남 계룡과 대전 유성에서 붙잡혔다. 범행 후 약 4시간 만이다. "이틀 전부터 주민센터 근처에서 못 보던 차가 있어서 차량 번호를 적어놨다"는 주민이 건넨 메모가 결정적 단서가 됐다.

지난달 30일 오후 7시쯤 전북 전주시 완산경찰서 1층으로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달아난 혐의(특수절도)로 긴급체포된 30대 용의자가 들어오고 있다. [뉴스1]

지난달 30일 오후 7시쯤 전북 전주시 완산경찰서 1층으로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달아난 혐의(특수절도)로 긴급체포된 30대 용의자가 들어오고 있다. [뉴스1]

논산에서 컴퓨터 수리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경찰에서 "유튜브를 통해 '얼굴 없는 천사'의 사연을 알게 됐다"며 "컴퓨터 수리업체를 하나 더 차리려고 범행을 계획했다"고 말했다. A씨가 무직인 B씨에게 먼저 범행을 제안했다.

경찰은 이들이 훔친 성금도 무사히 되찾았다. A4용지 상자에는 5만원권 지폐 다발(100장씩 각 500만원) 12묶음과 동전 담긴 돼지저금통이 들어 있었다.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힘내세요'라고 적힌 편지도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용의자들이 도주 과정에서 붙잡혔기 때문에 훔친 돈을 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했다.

1년간 기다려 온 성금이 감쪽같이 사라져 발만 동동 굴렀던 주민센터 직원들은 범인이 잡혀 안도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번 사건 때문에 '얼굴 없는 천사'가 상심할까 봐 걱정했다.

노송동주민센터 동네복지팀 박종표 주무관은 "처음엔 기부금까지 가져갈 정도로 각박한 세상이 됐나 싶어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는 "저희야 성금을 받는 입장이지만 '얼굴 없는 천사'는 매년 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고 꾸준히 기부했던 분인데 이 일로 인해 상처를 받아 '내가 이 일을 꼭 해야 하나' 기부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을 갖지 않을까 봐 걱정스럽다"고 했다.

앞서 '얼굴 없는 천사'는 이런 불상사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지난달 30일 오전 10시 3분쯤 '발신번호 없음'으로 노송동주민센터에 전화했다. "(성금이 든 상자를) 천사공원 내 희망을 주는 나무 밑에 놨으니 살펴 보세요"라고 짤막하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직원들이 천사공원에 달려갔지만, 성금이 든 상자는 없었다.

'얼굴 없는 천사'가 지난달 30일 오전 성금 6000만원이 든 상자를 두고 간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뒤편 '희망을 주는 나무'. [뉴시스]

'얼굴 없는 천사'가 지난달 30일 오전 성금 6000만원이 든 상자를 두고 간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뒤편 '희망을 주는 나무'. [뉴시스]

이후 그는 10시 7분과 12분, 16분 세 차례 더 전화를 걸어 "(주민센터) 뒤쪽에 상자 있다" "성금을 찾았느냐" "물건 아직 못 찾았냐"며 상자 위치를 재차 알려줬다. 30분 넘게 주변을 샅샅이 살폈지만, 성금 상자를 발견하지 못하자 주민센터 측은 오전 10시 37분 경찰에 도난 신고를 했다. 10시 46분 다섯 번째 전화를 건 그는 주민센터 직원으로부터 "성금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무척 당황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도 "경찰 조사가 이뤄지더라도 내 차량과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며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이름도, 직업도 베일에 싸인 '얼굴 없는 천사'는 매년 12월 성탄절 전후에 비슷한 모양의 A4용지 상자에 수천만원에서 1억원 안팎의 성금과 편지를 담아 노송동주민센터에 두고 사라지는 익명의 기부자다. 그는 지난 2000년 4월 초등학생을 시켜 58만4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중노2동주민센터에 보낸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남몰래 선행을 이어오고 있다.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20년간 모두 21차례 기부한 성금 총액은 6억6850만3870원에 달한다.  그가 건넨 성금은 생활이 어려운 4900여 세대에게 현금과 연탄·쌀 등으로 전달됐다.

전주시는 어렵게 회수한 성금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지역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등 소외계층을 위해 쓸 예정이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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