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 이 좋은 걸 할배들만 봤네" 열광···'스포츠 예능' 시대 왜

중앙일보

입력 2020.01.01 08:00

업데이트 2020.01.01 17:21

KBS ‘태백에서 금강까지 - 씨름의 희열’에서 황찬섭 선수(왼쪽)과 이승호 선수(오른쪽)의 대결 중 한 장면 [유튜브 캡쳐]

KBS ‘태백에서 금강까지 - 씨름의 희열’에서 황찬섭 선수(왼쪽)과 이승호 선수(오른쪽)의 대결 중 한 장면 [유튜브 캡쳐]

“직관(직접 관람) 신청했어요! 대박!! 이 선수들을 직접 볼 수 있다니 꿈만 같습니다!”
“씨름 너무 재밌어요! 제가 여기에 글을 쓰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KBS 예능프로그램 ‘태백에서 금강까지 - 씨름의 희열’의 시청자게시판에 올라온 후기다. ‘씨름의 희열’은 씨름 선수들이 경쟁을 벌여 최후의 1인자를 가리는 과정을 담은 스포츠 리얼리티 예능이다. 씨름판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인 셈이다. 첫 방송에서 2%의 시청률을 기록한 이 프로그램은 2회 2.4%, 3회 3.0%, 4회 2.5%를 기록 중이다. 토요일 오후 10시35분이라는 방송 시간대와 ‘씨름’이라는 비인기 종목을 다뤘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대 이상 선전’이라는 게 방송가의 평이다.

1980년대만 해도 설날 TV 프로그램 중 단연 최고 인기는 씨름이었다. 명절 때나 보는 정도였던 이만기, 이준희, 이봉걸 등 유명 씨름선수들이 당대 최고 스포츠선수였던 선동열, 최동원, 차범근급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인기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중장년층만의 볼거리로 전락했다.

이봉걸 선수를 상대로 안다리걸기로 제압, 극적인 승리를 거둔후 기뻐하고 있는 이만기 선수 [중앙포토]

이봉걸 선수를 상대로 안다리걸기로 제압, 극적인 승리를 거둔후 기뻐하고 있는 이만기 선수 [중앙포토]

그랬던 씨름이 최근 들어 미디어와 결합하며 ‘뒤집기’를 시도 중이다. 시작은 지난해 9월 유튜브에 오른 한 씨름대회 영상이었다. 아이돌 못지않은 외모와 몸매를 가진 청년 씨름선수의 경기 영상이 말 그대로 ‘히트’를 쳤다. 조회 수가 220만 건에 달하고 댓글은 1만6000개가 달렸다. “이 좋은 걸 할배들만 보고 있었네”, “넌(황찬섭 선수) 두 가지를 잡았지. 샅바 그리고 내 마음” 등 내용도 호평 일색이다.

유튜브로 연예인 반열에 오른 황찬섭 선수가 소속된 인천 연수구청 씨름단의 한대호 감독은 “씨름에 대해 살집 좋은 거구들의 느리고 지루한 힘겨루기 정도로 생각했던 젊은 층들이 식스팩의 탄탄한 몸매를 가진 얼짱 선수들의 역동적 움직임에 매료된 것 같다”고 말했다. 유튜브나 ‘씨름의 희열’에 가장 열광적 반응을 보이는 것도 20~30대 여성층이라고 한다.

‘씨름의 희열’도 이런 점에 착안해 출연 선수들을 경량급인 금강(90kg 이하) ㆍ태백(80kg 이하) 급으로 한정했다. ‘씨름의 희열’을 제작하는 박석형 KBS PD는 “역동적이고 빠른 기술 씨름을 보여줘야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해 경량급 선수들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막상 만나보니 인물이 좋은 씨름 선수들이 많아서 깜짝 놀랐다”고 덧붙였다.

예능프로그램과 스포츠의 결합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씨름선수 출신 강호동을 시작으로 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예능 프로그램에 진출해 인기를 얻었고, 스포츠를 다룬 예능프로그램도 수차례 나왔다. 다만 최근엔 관련 프로그램 포맷이 보다 다양해지면서 스포츠 스타들의 진출 폭도 넓어지고 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스포츠와 예능이 결합한 장르는 3세대에 걸쳐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태백에서 금강까지-씨름의 희열' [연합뉴스]

'태백에서 금강까지-씨름의 희열' [연합뉴스]

1세대는 1990년대 중반 천하장사였던 강호동의 연예계 데뷔다. 정 평론가는 “당시 강호동은 전직 운동선수 출신일 뿐이고 주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콩트를 하면서 개그맨의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후 데뷔한 야구선수 출신 강병규도 수려한 언변과 순발력을 바탕으로 전문 MC로 주목을 받았다.

2세대는 2000년대 들어 한국 스포츠가 급성장하면서 나타났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박지성, 안정환 등 유럽리그에 진출하는 선수들이 늘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선 야구가 금메달을 따면서 인기가 치솟으면서다. 또 김연아 선수의 피겨스케이팅 활약도 국민적 관심사였다. 그러면서 연예인들이 인기 운동 종목에 도전하는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나왔다.

1990년대 중반 코미디언으로 활동한 강호동씨 [중앙포토]

1990년대 중반 코미디언으로 활동한 강호동씨 [중앙포토]

연예인들로 구성된 야구팀이 전국의 야구 동호회를 찾아가 시합을 벌이는 ‘천하무적 토요일-천하무적 야구단’(KBS)이나 연예인들이 김연아 선수의 지도를 받아 피겨스케이팅에 도전하는 ‘키스앤크라이’(SBS)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스포츠 선수들의 예능 활동의 문턱도 낮아졌다.

최근에는 대세가 된 리얼리티와 오디션 프로그램과 함께 스포츠와 예능의 결합이 본격화됐다. ‘슈퍼맨이 돌아왔다’(KBS)나 ‘뭉쳐야 찬다’(JTBC)에 출연한 이동국ㆍ안정환 선수 등은 과거 같은 감초 역할이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맹활약했다. 해당 선수와 가족들의 일상을 보여주거나 스포츠 스타들이 팀을 이뤄 생소한 종목의 경기에 도전하는 식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예능 프로그램에서 얼굴을 볼 수 있는 스포츠 선수들도 과거보다 큰 폭으로 확장되고 있다. 허재ㆍ서장훈ㆍ양준혁ㆍ여홍철ㆍ이봉주ㆍ심권호 등 화려한 경력을 갖춘 ‘레전드’급 선수들이 대거 진입했다.

김연아 선수와 연예인들이 피겨스케이팅을 익히는 예능 프로그램 '김연아의 키스앤크라이' [자료=SBS]

김연아 선수와 연예인들이 피겨스케이팅을 익히는 예능 프로그램 '김연아의 키스앤크라이' [자료=SBS]

그렇다면 최근 예능 프로그램이 스포츠 선수와 좋은 궁합을 보이는 이유는 뭘까.
박석형 KBS PD는 “리얼리티와 오디션 프로그램이 활성화되면서 시청자들이 ‘짜고 치는 각본’에 대해선 거부감이 있다. 반면 스포츠 경기는 PD와 작가들도 예상치 못하는 과정과 결과가 펼쳐지기 때문에 긴장감이 유지된다. 그런 점이 요즘 시청자들의 기호와 잘 맞는다”고 말했다.

유호진 tvN PD는 스포츠 선수 특유의 ‘캐릭터’를 꼽았다. “연예인들은 대중들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다 보니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고, 튀는 발언을 하기도 쉽지 않다. 반면 스포츠 선수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툭툭 다 해도 대중들이 용인해 준다. 그런 점이 최근 주목을 받는 리얼리티 장르와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 또 스포츠 캐스터를 거친 경우엔 언변도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6월 18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울가든호텔에서 열린 JTBC 예능'뭉쳐야 찬다'제작발표회에서 출연진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6월 18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울가든호텔에서 열린 JTBC 예능'뭉쳐야 찬다'제작발표회에서 출연진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실적인 캐스팅 문제도 있다. 한 방송 관계자는 “예능프로그램에서 솔직히 A급 배우나 가수는 섭외가 어렵다. 반면 운동선수들은 A급 선수들도 비시즌에는 출연에 호의적이다. 대중들에겐 인기 운동선수도 연예인 못지않은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에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좋은 자원이 된다”고 말했다.

반면 해외에서는 인기 스포츠 스타들이 이렇게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경우가 드물다.
NBA 특급 센터였던 샤킬 오닐이 래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유명 선수들은 은퇴 후 감독, 구단주, 해설자 등 관련 직종에서 활동하는 게 일반적이다. 전설적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은 NBA 구단인 샬럿 호네츠의 구단주이고, 1998 프랑스 월드컵 우승을 이끈 지네딘 지단은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이다. 또 잉글랜드 국가대표 축구팀의 간판 공격수였던 게리 리네커도 10년 넘게 BBC의 축구 프로그램 ‘매치 오브 더 데이’의 진행을 맡고 있다.

선수 시절 '그라운드의 지휘자'로 명성을 날린 지네딘 지단 레알마드리드 감독 [연합뉴스]

선수 시절 '그라운드의 지휘자'로 명성을 날린 지네딘 지단 레알마드리드 감독 [연합뉴스]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의 대표적 공격수였던 게리 리네커. 현재는 BBC의 축구프로그램 '매치 오브 더 데이'의 진행자로 활동 중이다. [중앙포토]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의 대표적 공격수였던 게리 리네커. 현재는 BBC의 축구프로그램 '매치 오브 더 데이'의 진행자로 활동 중이다. [중앙포토]

허구연 MBC 야구해설위원은 한국에서 유독 스포츠 스타가 예능으로 진출하는 이유 중 하나로 인프라 부족을 꼽았다. 허 위원은 “미국은 야구만 해도 메이저리그부터 싱글A리그까지 팀이 수백개에 달하고 데이터분석가, 에이전트 등 운동선수들이 제2의 인생을 펼칠 수 있는 다양한 직종이 있다. 그래서 선수들도 은퇴 후엔 지도자 수업이나 전문분야 공부를 열심히 한다”며 “하지만 한국은 프로 스포츠팀도 많지 않고, 관련 인프라도 초보 수준이다. 구단주나 단장도 선수보다는 모기업 출신 인사들이 많다. 선수들이 자꾸 밖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