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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옇게 흐린 해가 떠도 환호한다, 정동진은 그런 곳이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21)

온 방송사가 난리를 쳤던 2000년 새해가 어느새 20년 전 이야기가 된다. 2000이란 숫자에 흥분하여 떠오르는 해도 아마 헤까닥 바뀐 색으로 떠오를 것 같은 설렘에, 우리 가족도 전날 해를 보러 강원도로 출발했다. 차가 밀릴 것을 예상하여 일찍 출발했지만 밤늦은 시간에는 도착할 줄 알았다.

우리의 계획은 그렇게 도착하여 차에서 쪽잠을 자고 새벽에 떠오르는 해를 보는 것이었다. 이불도, 간단한 식사 도구도 다 차에 실었다. 그날 밤 우리는 밀리는 차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가다가 새벽 3시쯤 ‘강원도입니다 어서 오십시오’라는 푯말을 보았다.

20년 전인 2000년,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 강원도로 해돋이를 보러 갔다. 계획은 차에서 쪽잠을 자고 새벽에 일출을 보는 것이었는데, 밀리는 차에 오도가도 못하는 와중에 길목에서 해가 떠올랐다. [사진 pexels]

20년 전인 2000년,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 강원도로 해돋이를 보러 갔다. 계획은 차에서 쪽잠을 자고 새벽에 일출을 보는 것이었는데, 밀리는 차에 오도가도 못하는 와중에 길목에서 해가 떠올랐다. [사진 pexels]

밤을 꼴딱 차에서 세우고 다시 떠밀리듯 기어가다가 대관령 길목에서 뿌옇게 흐린 해가 떠올랐다.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많은 차와 인파로 모두 차 밖으로 나와서 어제와 똑같은 해를 보며 소리 질렀다. 그러나 그날의 환호소리는 무언가 특별하고 흥분되었다. 해는 다른 해와 다르지 않았지만 2000이란 의미는 확실히 달랐다. 먼 길에 지친 많은 사람이 길가에 차를 세우고 비상용으로 준비한 코펠이나 부탄가스 버너에 라면을 삶아 나눠 먹었다. 그 맛은 먹어본 사람만이 안다.

주차할 곳이 없는 정동진은 너무 많이 모인 인파에 차를 세울 여건이 안 되었다. 그대로 직진하여 강릉에 도착하니 정오가 되었다. 쫄쫄 굶은 탓에 허름한 식당에서 된장찌개를 시켜 먹고 식당 한쪽에 걸린 거울을 보니 세수도 못하고 밤을 꼴딱 샌 몰골은 가관이 아니었다.

그곳이 고향인 듯한 동네 어른 한 분이 식당에 들어오더니 무심코 한마디 한다.
“해마다 그놈의 태양이 올해는 더 난리네. 농로에도 길을 막고 세워서 밭에 거름 뒤집으러도 못 가고 이게 뭔 일이래요? “ 궁시렁 궁시렁 투덜거렸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물었다. “아이구~서울서 여기까지 해 보러 온 거요?. 거기는 해가 날마다 안 떠요?” 노인의 말투가 꼬였다.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거긴 관광지 아닌가. 고생고생 올라온 우리에겐 김빠진 맥주처럼 기운 빠지고 섭섭한 말이었다. 이왕이면 새천년의 첫해인데 하고 많은 날 중에 그날 거름을 뒤집어야 하남. 좋은 날엔 색다른 의미를 부여해주면 좀 좋은가 말이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꼰대 같이 늙지 말자~ 라며 혼잣말한 기억이 난다.

생각해 보니 서울의 태양도 날마다 새롭게 떴지만 하늘 쳐다볼 시간 없이 바쁘게 살았다. 바다에서처럼 계란 노른자같이 둥실하고 뜬 걸 본 적은 거의 없다. 사물이 보이고 나뭇잎이 반짝이면 이미 해가 뜬 걸 느끼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달리며 살아왔다. 그들에겐 눈만 뜨면 둥실 떠오르는 태양이 우리에겐 새로운 희망을 품게 하는 멋진 풍경이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그날의 고생을 이야기하며 즐거워했다. 진정한 삶의 재미는 그런 무심한 삶속의 작은 이벤트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20년이 흐른 지금 학생이던 아이들이 어느새 결혼을 하여 제 자식들이 생겼다. 올해 일출을 보러 어디로 갈까를 날마다 계획한다. 내가 고생한 그때를 상기시키며 멀리 갈 생각 말고 집에서 조용히 보내라고 해도 듣는 둥 마는 둥이다.

서울의 태양도 날마다 새롭게 떴지만 하늘 쳐다볼 시간 없이 바쁘게 살았다. 바다에서처럼 계란 노른자같이 둥실하고 뜬 걸 본 적은 거의 없다. 사진은 정동진 해돋이 풍경. [사진 강릉시]

서울의 태양도 날마다 새롭게 떴지만 하늘 쳐다볼 시간 없이 바쁘게 살았다. 바다에서처럼 계란 노른자같이 둥실하고 뜬 걸 본 적은 거의 없다. 사진은 정동진 해돋이 풍경. [사진 강릉시]

아이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그 날은 행복했던 날이다. 어느 땐 부모님의 등에 업혀 올라가 산꼭대기에서 해를 보고, 어느 땐 바다에서 보던 해, 아빠 목에 무등타고 바라보던 보신각 종치는 모습, 의미를 몰라도 함께 지르던 환호 소리, 은은하게 들려오던 종소리, 캄캄한 밤을 밝혀주던 불꽃놀이. 새해 첫날 산에서, 바다에서 누군가의 정성이 담긴 아침 떡국 한 그릇. 그날에만 느낄 수 있는 흥분이다. 제 아이들에게도 그런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나이 땐 그렇게 주렁주렁 아이들을 끌고 설레발을 치고 다녀야 하는 나이인가 보다.

올해도 2020년의 새로운 첫해가 떠오른다. 멀리 해돋이 가신 모든 분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그리고 귀가하실 때까지 사고 없이 잘 돌아오시길 바란다. 신문을 뒤적이며 새해맞이 축제를 하는 일출암을 가볼까 내 마음도 설레며 흔들린다. 2020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과 평안을 빕니다. 사랑합니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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