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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편집국장 레터]움직이는 손가락이 쓰는 겁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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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7호 면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중앙SUNDAY 편집국장 김종윤입니다. 패스트트랙(신속처리 안건)에 오른 선거법 개정안이 27일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다음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 차례입니다. 이날 본회의에 상정될 예정이고, 야당은 필리버스터로 맞설 방침입니다. 임시 국회 회기가 종료되면 필리버스터도 끝납니다. 다음 주 새로운 임시국회가 열리면 곧바로 표결할 예정입니다.

현 단계에서 공수처 설립을 위한 입법을 막을 수단은 없어 보입니다. 자유한국당은 반대 목소리를 높이지만 수적 열세이기 때문에 입법을 무산시킬 능력이 안 됩니다. 검찰의 반발이 있지만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입니다. 입법은 국회의 몫입니다.

지난 26일 서울 여의도 공원과 국회 앞에서 각각 고위공직자수사처 설치 찬성(위)과 반대를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의맞불 집회가 열렸다. 뉴스1

지난 26일 서울 여의도 공원과 국회 앞에서 각각 고위공직자수사처 설치 찬성(위)과 반대를 요구하는 시민단체들의맞불 집회가 열렸다. 뉴스1

4+1(더불어민주당ㆍ바른미래당 당권파ㆍ정의당ㆍ민주평화당 대안 신당) 협의체가 합의한 공수처 법안이 논란이 되는 건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공수처 설립의 전제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검찰 같은 무소불위의 기관을 통제하겠다는 공수처를 정작 누가 통제합니까.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법안을 보면 검찰이나 경찰이 범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고위공직자 범죄 등을 알게 되면 이를 즉시 공수처에 통보해야 합니다. 통보받은 사건을 공수처가 수사하겠다고 나서면 검ㆍ경은 즉각 사건을 공수처에 넘겨야 합니다. 이런 구조에서 공수처가 비리를 덮으면 그만입니다. 공수처장 등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국회 동의를 받는 절차도 거치지 않습니다. 이건 특정 권력이 아니라 국민이 통제해야 한다는 공수처 설립의 대원칙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동안 검찰권의 남용은 ‘불기소’에서 두드러졌습니다.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이 재판에 부치지 않고 봐주면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검찰권을 견제와 균형이라는  시스템 틀 안에 넣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싹튼 겁니다. 그런데 공수처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장치가 없다면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이번 개혁의 핵심은 검찰과 경찰, 그리고 공수처라는 트라이앵글 구조를 만들어 서로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법안은 공수처가 검경의 상급기관이 돼 통제하고, 자신은 견제받지 않는 모양새입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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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조에서 공수처를 악용하면 누구에게는 봐주기 수사를, 누구에게는 탄압 수사를 할 수 있습니다. 검찰에 쏟아지는 비판이 그대로 공수처로 옮겨가는 꼴입니다. 여권에서는 “검찰과 경찰의 의도에 따라 사건이 ‘암장(은폐)’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런 조항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공수처가 ‘암장’시키는 사건은 어떻게 할 것이냐”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선한 의도로 법과 제도를 만들었다고 해도 문제는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현 정권에서는 절대 공수처를 악용하는 건 없다고 주장하겠지만, 확신을 주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 정권이 바뀌면 새 정부에서 얼마든지 공수처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습니다. 선한 의도가 악행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는 겁니다.

아랍 시인 우마르 하이얌의 정형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움직이는 손가락이 쓰는 겁니다.’ 쓴 글은 지울 수 없다는 내용인데, 한 번 벌어진 일은 되돌리기 힘들기 때문에 미리 잘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손가락이 움직이고 나면 나중에 탈이 날 수 있습니다. 손가락이 움직이기 전에 여야는 공수처법 수정을 위한 새로운 협상에 들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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