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든, 60대든, 새출발 '시동'거는 그 순간이 청춘

중앙일보

입력 2019.12.24 13:59

업데이트 2019.12.24 17:31

영화 '시동'의 최정열 감독이 17일 삼청동 카페 죠꽁드에서 인터뷰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영화 '시동'의 최정열 감독이 17일 삼청동 카페 죠꽁드에서 인터뷰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거석이 형이 이렇게 싱크로율로 칭찬받을 줄 몰랐어요.”  

영화 ‘시동’(18일 개봉)으로 엿새 만에 125만 관객을 동원한 최정열(40) 감독의 말이다. 영화는 가출한 10대 택일(박정민)이 중국집 장풍반점에 배달부로 취직해 진짜 세상을 만나게 되는 성장담. 삐딱한 택일에게 수시로 불주먹을 날리는 정체불명의 주방장 거석이 형 역은 원작 웹툰 팬들이 캐스팅 1순위라 거론했던 배우 마동석이 맡았다.

'엑시트' 제작사 새 영화 '시동'
최정열 감독 "저도 반항아였죠"

"마동석은 희비극의 천재"

“이건 좋다, 안 좋다 하는 의견들이 제약이 될까봐, 댓글은 안 읽고 시나리오 작업을 했거든요.”

택일과 거석이형이 중국집 주방에서 맞선 모습. 마동석은 특수제작한 가발과 헤어밴드를 썼다.[사진 NEW]

택일과 거석이형이 중국집 주방에서 맞선 모습. 마동석은 특수제작한 가발과 헤어밴드를 썼다.[사진 NEW]

17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최 감독은 그런데도 마동석이 떠올랐다 했다. “거석이형 서사는 희비극의 큰 간극을 표현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어요. 마동석은 워낙 두 가지를 오가는 데 천재에 가까운 배우잖아요. 조금만 과하면 영화가 붕 뜨고, 너무 가라앉으면 초반부 유머가 잘 살지 않을 것 같았는데 영화와 딱 맞는 선의 최대치까지 항상 연기해주셨죠.”

그는 마동석이 “동물적 감각, 순발력에 의존하는 배우만도 아니”라며 “중요한 장면이 있을 때면 전화가 와서 몇 시간씩 통화하며 동선 등을 의논했다. 많이 배웠다”고 돌이켰다.

어려운 미션 성공시켜온 박정민…

마동석뿐 아니다. ‘시동’은 만화를 찢고 나온 듯 기상천외한 캐릭터가 돋보인다. 배우들의 기존 이미지를 슬쩍 비튼 연기도 재밌다.
‘동주’의 독립운동가, ‘그것만이 내 세상’의 서번트증후군 피아노 천재 역할로 주목받은 박정민은 허당기 다분한 반항아 택일 역을 절묘한 호흡으로 즐기듯이 연기했다. 오랜만에 멜로‧로맨스를 벗어난 정해인은 암흑가로 뛰어들었다가 호된 성장통을 겪는 택일의 친구 상필 역이 의외로 어울린다.

상필(오른쪽) 역의 정해인이 인상 쓰는 연습하는 장면은 배우들의 아이디어로 빚어낸 것이다. [사진 NEW]

상필(오른쪽) 역의 정해인이 인상 쓰는 연습하는 장면은 배우들의 아이디어로 빚어낸 것이다. [사진 NEW]

“박정민은 항상 어려운 미션을 성공시켜온 배우잖아요. ‘시동’에선 부담감을 갖기보단 즐겁게, 그 또래다운 사랑스러움을 표현하길 바랐어요. 정해인 배우는 ‘레디액션 청춘’(2014)부터 팬이었고 누가 봐도 어둠의 세계에 빠져들 것 같지 않은 배우여서 더 적역이었어요. 드라마 ‘봄밤’에서 상반된 캐릭터로 출연하고 있었는데도 우리 현장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와줬죠. 아이디어가 정말 많아요. 윤경호 배우와 인상 쓰는 연습하는 것도 배우들끼리 리듬을 맞춰가며 즉석에서 만들었죠.” 최 감독은 말했다.

30대 배우들이 10대 연기했지만 

실제론 30대 배우들이 10대 역할을 맡았다.  

“‘말죽거리 잔혹사’ ‘비트’ 같은 선례가 있어서 크게 고민하진 않았다. 지금의 10대들 언어나 트렌드는 다를 수 있지만 뭔가 폼 잡고 싶은데 그렇게 안 되는 어설픔 같은 건 세대를 떠나서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의 10대를 너무 쫓아가면서 캐릭터를 만들기보단, 고등학교 때 누구나 한 번쯤 염색해보고 싶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빨리 어른 돼서 돈 벌고 싶은 감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보편적일 것이라 생각했죠.”

영화 '시동'의 원작인 조금산 작가의 동명 웹툰 속 캐릭터 택일. [일러스트 조금산]

영화 '시동'의 원작인 조금산 작가의 동명 웹툰 속 캐릭터 택일. [일러스트 조금산]

반항아 택일한테 강스파이크를 날리는 엄마 정혜 역의 염정아도 눈에 띈다. 자식한테 무뚝뚝한 엄마 역은 처음이란다. 최 감독은 “전직 배구선수라는 신체적 조건에, 무뚝뚝함 속에 아들을 사랑한다는 걸 (관객한테) 순간순간 설득시켜야 하는 까다로운 역을 정확한 감정으로, 에너지를 뿜어내며 소화해주셨다”면서 “택일과 합 맞추는 장면들은 현장에서 보며 나도 울컥울컥했다”고 돌이켰다.

'엑시트' 제작사가 주목한 신인감독 

학교도 싫고, 잔소리도 싫다며 무턱대고 집을 나온 택일은 자라온 울타리를 벗어나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을 만나며 좌충우돌한다. 큰 사건 없이 캐릭터를 쫓아가다 보니 스토리가 심심하단 평가도 나온다. 최 감독은 오히려 원작 웹툰의 그런 점이 좋았다고 했다. “다른 시나리오를 쓰던 중에 우연히 웹툰을 봤는데 대단한 사건·사고가 없다는 게 매력적이었어요. 우리가 지나칠 수 있는 일상을 따뜻하게 품고 있으면서 인물들한테 뭔가 교훈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이런 영화도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제작사에 먼저 제안했죠.”

최정열 감독의 데뷔작 '글로리데이'도 갓 스무 살 청춘들이 길을 떠나며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사진 엣나인필름]

최정열 감독의 데뷔작 '글로리데이'도 갓 스무 살 청춘들이 길을 떠나며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사진 엣나인필름]

이 영화의 제작사는 올해 ‘사바하’ ‘엑시트’로 흥행을 거둔 외유내강. 강혜정 대표, 류승완 감독 부부의 영화사다. 3년 전 최 감독의 장편 데뷔작 ‘글로리데이’를 본 조성민 부사장이 차기작을 함께하자고 권하며 인연을 맺었다.
그러고 보면 ‘글로리데이’도 갓 스무 살 친구들이 여행을 갔다가 불행에 휘말리는 성장영화였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tvN) 이전의 류준열과 신예 지수, 아이돌그룹 ‘엑소’의 수호 등 신인 배우들의 호연을 이끌어내 호평을 받았다. 최 감독이 청룡영화상 단편영화상, 대구단편영화제 대상 등을 휩쓸었던 단편 ‘잔소리’(2008)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잔소리를 그리워하는 아들 얘기다.

20대 언저리 청춘들의 성장통을 주로 그려왔다.  

“청춘영화도 좋아한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 젊은 세대라기보단 새 출발을 하는 사람들한테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보통 새 출발의 시기라고 여기는 고등학교, 대학 졸업 후뿐만 아니라 30대나, 40대, 50~60대 은퇴를 앞둔 분들도, 또 영화를 하는 저도,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새로운 출발선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딜레마를 겪고 어떤 선택 속에 어떤 결과를 얻는지, 그로 인해 또다시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지 호기심이 많다. ‘시동’에선 아무런 성과가 없거나 다시 돌아가게 돼도 괜찮다, 아무 상관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저도 반항아였죠 

그는 “가출청소년 지도교사, 가출 경험이 있는 고등학생 등을 만나고 자료 조사도 했다”면서 “요즘 ‘가출팸’ 등 현실은 정말 어둡더라”고 했다. 원작 웹툰도 영화보다 더 어두운 분위기였다.

가출, 조폭 같은 어두운 소재를 밝고 낙관적으로 풀었는데.  

“전작 ‘글로리데이’ 속 캐릭터들한테 부채감이 있었다. 사회성을 짙게 깔고 있던 영화고, 나도 (주인공들 주위의) 저런 어른인 것 같아서 부끄럽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는데 (영화가 비극으로 끝난 것이) 돌아보니 연출자로서 문을 쾅 닫아버린 것 아닌가, 아이들을 그 안에 가둬놓고 끝내버린 게 아닌가, 싶더라. ‘시동’으로 그 문을 열고 싶었다. 대단한 희망까진 아니지만 더 따뜻하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영화 '글로리데이'에서 사건에 휘말려 도망치는 주인공들. [사진 엣나인필름]

영화 '글로리데이'에서 사건에 휘말려 도망치는 주인공들. [사진 엣나인필름]

그는 자신도 반항아였다고 돌이켰다. 고등학교 때 영화감독을 꿈꿨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대학은 결국 경제학과에 갔다. 머리에도 들어오지 않는 미시경제, 거시경제에 시달리다 군 제대 후 KOICA(한국국제협력단) 봉사활동을 갔다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 마음먹었단다. “거기 가보니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만 모여 있었어요. 온종일 원숭이만 쳐다보던 형은 지금 유명한 동물학박사님이 됐죠. 식물만 연구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나도 영화감독 해야겠다, 마음먹고 10년을 독립영화계에 있었죠. 몸은 힘들지만, 매일매일 재밌고 뿌듯했어요.”

의심 들 때마다 그때 그 관객 떠올려

‘시동’의 총제작비는 90억원(손익분기점 240만명). 첫 장편보다 10배 넘는 규모의 영화를 만들게 됐다. 그는 여전히 영화 만드는 일이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안개를 헤쳐나가는 듯 뭔가 보일 듯하면서도 끝없이 희미한 작업”이라 표현했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힘을 주는 기억이 있었다.
“제가 찍은 단편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을 때 부모님과 온 옆자리 관객분이 끝나고 되게 많이 우시더라고요. 너무 좋다, 재밌었다면서. 그분들 대화가 저를 따뜻하게 품어줘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영화를 정말 계속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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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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