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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추운 다락방에도 사랑이 찾아왔네요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형철의 운동화 신고 오페라 산책(11)  

얼마 전에 다소 늦게 첫눈이 내렸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이의 머리에도, 행복감에 두 팔 벌려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나 좌절감에 고개 숙인 사람에게도 내렸겠지요. 그중 가장 아름다운 눈은 사랑하는 연인의 머리 위로 내리는 눈일 것입니다.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어도 좋고, 치즈케이크와 카페라떼 세트도 좋으며 아메리카노 한잔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것이 사랑 아니겠어요? 그들 위로 내리는 눈은 그 자체가 축복이랍니다. 그런 사랑스러운 눈이, 그것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펑펑 내리는 오페라가 여기 있답니다. 오페라 <라 보엠〉!

1896년 푸치니가 발표한 〈라 보엠〉은 19세기 초 파리를 배경으로 젊은 시인과 화가, 음악가, 철학자 등 춥고 배고픈 예술가의 삶과 우정, 그리고 미모의 병든 아가씨와의 러브스토리가 찬란한 그림처럼 펼쳐지는 작품이랍니다. 젊은 시절의 추억이 담겼을 법한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같은 스토리지요.

가난한 청춘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라 보엠>. [사진 Flickr]

가난한 청춘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라 보엠>. [사진 Flickr]

막이 오르면 다락방이랍니다. 계단을 한없이 올라오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겨울에 바람이 제일 거칠게 휘감고 가는 추운 방. 주머니가 얇은 가난한 사람들이 찾는 방이랍니다. 요즘도 경제 사정이 어려우면 반 지하방 또는 달동네, 그중에서도 달님과 더 가까운 옥탑방에 살게 되지요.

크리스마스이브, 한참 추운 겨울날이지요. 가난한 시인 로돌포와 화가 마르첼로가 작업을 하고 있는데, 난로는 돌아서 버린 여자의 마음처럼 차디찹니다. 로돌포는 자기가 어렵게 써낸 원고를 태우자며 찢어 난로에 넣어 버립니다. 날은 춥고 배도 고픈데, 이따위 글은 써서 뭣하나 하는 젊은 혈기인 것 같아요. 다행히 음악가 친구인 쇼나르가 알바로 돈을 좀 벌어와 성탄을 즐기자며 카페거리로 나섭니다.

로돌포만 기한이 코앞인 원고를 마친 뒤에 뒤따르기로 하고 글을 쓰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납니다. 촛불이 꺼져 불을 빌리러 왔답니다. 그런데 얼굴도 창백하고 아파 보이네요. 촛불을 붙이고 나가다가 열쇠를 잃었다며 다시 들어오는데, 바람이 불어 모든 촛불이 꺼졌습니다. 캄캄한 방바닥을 서로 더듬거려 열쇠를 찾다가 아가씨의 손을 잡은 로돌포. 그녀의 손이 차다고 말을 걸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아리아 ‘그대의 찬 손’과 자신을 소개하는 아리아 ‘내 이름은 미미’를 서로 부르며 사랑에 빠진 그들은 함께 친구들에게 갑니다.

카페거리에서 로돌포는 없는 돈을 털어 미미에게 분홍모자를 선물하지요. 마르첼로는 헤어졌던 애인 무제타를 극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고, 모두 함께 행복한 성탄을 보낸답니다. 사랑에 빠진 로돌포와 미미는 같이 지내게 되지요.

시간이 얼마간 지난 어느 날, 쓸쓸한 분위기를 더해주며 어둠 속에 눈이 내립니다. 로돌포는 마르첼로와 무제타가 운영하는 선술집의 구석에 구겨져 자고 있습니다. 이때 미미가 와서 로돌포의 심한 질투와 의심 때문에 힘들다며 마르첼로에게 하소연합니다.

마침 로돌포가 나오는 소리에 미미는 나무 뒤에 숨고, 로돌포는 마르첼로에게 미미가 아무에게나 추파를 던져서 싫증 났다고 비난을 하네요. 마르첼로가 그럴 리 없다며 믿질 않자, 속마음을 털어놓는답니다. “사실 그녀가 죽어가고 있어. 폐병이 있었잖아. 피도 토한다고. 그런데 가난한 시인 나부랭이랑 살다간 약도 못 써보고 죽을 것 같아. 내가 떠나야만 해” 그는 무기력한 스스로에게 화가 난 것이었답니다. 아,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가장의 고통이란!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미미가 로돌포의 품에 안깁니다. 두 사람은 결국 사랑하지만, 서로를 위하여 관계를 정리하기로 합니다. 예전에 가수 최백호는 연인에게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라고 했는데, 겨울에 헤어짐은 더더욱 외로워 두 사람은 봄이 되면 헤어지기로 합니다. 연인 무제타가 술집 고객에게 추파를 던졌다고 크게 싸운 마르첼로도 서로를 욕하며 헤어졌답니다. 두 친구는 같은 날 사랑을 하고, 같은 시간 헤어집니다.

죽음을 예견한 미미가 로돌포를 찾아오고. [사진 Flickr]

죽음을 예견한 미미가 로돌포를 찾아오고. [사진 Flickr]

장면이 바뀌어 처음과 같은 다락방입니다. 조금 따스해진 봄날, 역시 로돌포와 마르첼로가 작업을 하며 각자 헤어진 애인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그때 무제타가 들어와 미미를 데려왔다고 합니다. 길에서 쓰러져 있던 미미가 로돌포를 보고 싶다고 했다는 거예요. 아, 창백한 미미.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모습이네요.

두 사람의 마지막 시간, 미미는 최후의 아리아 ‘다들 갔나요?’를 부르며 행복했던 사랑을 회상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저 사랑해요. 같이 있어서 행복했어요.” 아! 추억할 것이 너무나 많은데, 거친 기침과 함께 미미의 숨결은 점차 약해집니다.

모든 친구들이 위로하는 가운데, 미미는 손을 떨굽니다. 창가에서 눈물을 훔치던 로돌포만 모르고 있지요. 오케스트라가 폭풍처럼 무대를 흔들고서야 그녀의 죽음을 눈치챈 로돌포는 미미를 부둥켜안으며 고통에 찬 오열을 내뿜습니다. “미미!~” 짧은 비명과 함께, 아름답고 슬픈 이들의 사랑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 오페라는 대단한 사람들의 엄청난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우리는 신데렐라 드라마도 좋아하지만, ‘동백꽃 필 무렵’처럼 소소한 스토리에도 감동 받잖아요. <라 보엠〉에는 애틋하고 가슴 저미는 따뜻한 사랑 이야기와 그것에 위안받고 또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선율로 그 마음들을 토닥토닥해주는, 푸치니의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오페라지요.

이 따스한 선물을 받아 든 우리들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외칩니다. “숨찬 청년들이여~ 힘들어도 오늘은 사랑하시라, 뜨겁게!”

오페라 해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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