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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치의 ‘붓치폰’과 남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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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도쿄총국장

서승욱 도쿄총국장

1998년 김대중 대통령(DJ)과 함께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만들어낸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그림 오른쪽) 전 총리는 ‘붓치폰’으로 유명했다. ‘붓치폰’은 오부치의 ‘부치’와 ‘푸시폰(누르기식 전화기)’을 결합한 말이다. 총리 재임 시절 누구에게나 불쑥 전화를 걸어 “오부치입니다”라고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미야기 다이조 『현대일본외교사』)

대학원생이던 1963년 세계여행을 떠나며 그는 미국의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에게 편지로 면회를 신청했다. 그런데 케네디는 이름도 모르는 청년 오부치를 20분이나 만나줬다. “정치인이 돼 워싱턴에서 다시 만나자”는 덕담까지 했다. 그 일을 계기로 오부치는 “높은 자리에 오르더라도 몸을 낮추고 누구와도 대화하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현직 총리가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프로그램에 깜짝 출연하기도 했고, 신문 독자 투고란에 글이 실린 일반인들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식은 피자처럼 우유부단하다”고 자신을 비판하는 기자들에게 피자를 배달시킬 정도의 풍류도 있었다.

‘한·일관계의 교과서’로 불리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탄생엔 항상 귀를 열고 소통하는 두 정상의 열린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글로벌 아이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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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꽉 막혀있던 한·일 간 소통이 이제야 조금씩 뚫리는 분위기다. 얼마 전 함께 식사한 일본인 지인은 “한국 외교부와 주일대사관에 대한 일본 내 평가가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지한파 정치인인 가와무라 다케오(河村建夫) 일·한의원연맹 간사장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남관표(그림 왼쪽) 주일대사가 총리관저와 열심히 소통 중”이라고 했다. 남 대사는 ‘대사관 넘버 2’인 정무·경제 공사에게도 일정을 알리지 않고 수많은 일본인들을 만나고 있다.

이런 남 대사에 대해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서도 할 말은 꼭 한다. 약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는 일본인들이 많다. 김상훈 공사참사관 등 실무팀장급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의지가 보인다”는 평가가 있다.

일본 외무성의 한국 담당 직원들까지도 ‘한국 대사관’이라면 치를 떨었던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물론 아직도 “30분을 만나면 28분 동안 자기 말만 한다”고 지적받는 이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말이다.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의 생명 연장, 12월 말 양국 정상회담의 성사엔 이렇게 쌓인 작은 변화들이 긍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징용문제든, 수출규제든 양국 간 현안 해결의 열쇠는 상대 목소리에도 귀를 여는 외교의 기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서승욱 도쿄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