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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혁주 논설위원이 간다

“회장님 살아있다면, 정권 실세 외국에 보내 시각 넓혔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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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우중 빈소에서 만난 대우맨들의 회고

김우중 회장은 출장 비행기 안에서도 끊임없이 일했다. 영어로 연설해야 할 때면 원어민이 녹음한 원고를 비행기 안에서 계속 들었다.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김우중 회장은 출장 비행기 안에서도 끊임없이 일했다. 영어로 연설해야 할 때면 원어민이 녹음한 원고를 비행기 안에서 계속 들었다. [사진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외환위기로 대우가 해체되고 한참 지난 2009년 말. 행사 참여 차 방한한 영국인 경영 컨설턴트가 취재진에게 대우자동차 얘기를 꺼냈다. “1990년대 대우차는 영국에서 파격적인 애프터서비스(AS)를 했다. 차에 이상이 생기면 다른 차를 갖고 와 고칠 때까지 쓰게 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서비스였다. 이로 인해 대우차는 영국에서 급성장했다. 대우차는 제품을 어떻게 팔 것인가뿐 아니라 소비자가 자동차를 쓰는 동안 어떻게 서비스할지를 궁리했다.”

1990년대 초반 운동권 40명 특채 #“시각 좁을 뿐 희생정신 갖춰” 판단 #새벽부터 밤중까지 일하던 김 회장 #“세상에 도움되는 재미에 일한다”

당시 대우 그룹 ‘세계 경영’ 전략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다. 그러고 10년. 대우 그룹 도전의 역사가 다시 만발했다. 지난 10일 저녁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의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빈소에서였다. 지켜본 이날 오후 5시쯤부터 밤늦게까지 160석 접객소는 빈자리가 없었다. 상당수가 서로 아는 얼굴인 듯, 인사가 수시로 오갔다. 그룹 해체 당시 초년병이던 50대부터 대표이사·임원이었던 70, 80대까지 옛 대우맨들이었다. 이들은 모여 앉아 도전의 추억을 하나하나 풀어갔다. 표정에는 자긍심이 가득했다. 소주잔이 오가며 얼굴이 살짝 붉어진 뒤에는 그룹 해체에 대한 회한과 분노를 언뜻언뜻 내비쳤다. 70, 80대 옛 CEO들도 늦게까지 빈소를 지켰다.

김태구(78) 전 대우차 사장은 70년대 ‘대우실업’ 시절을 떠올렸다. 일단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수출 주문을 따내고 보던 때였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가 전쟁을 벌였다. 대만산 헬멧을 구해 에티오피아에 수출하기로 계약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에티오피아를 소련이 지원했다. 그래서 미국이 에티오피아로의 헬멧 수출을 막았다. 포기하려 했으나 김우중 회장은 달랐다. 헬멧을 우회 수출할 수 있는 나라가 없는지 뒤졌다. 결국 성공했다. 그 양반, 우리가 보면 도저히 안 되는 일을 해냈다. 동유럽 자동차 진출? 그게 쉬웠다면 서구 업체들이 왜 진작 안 갔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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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사장은 이어 ‘창조·도전·희생’이라는 대우 정신을 정하던 때의 일화를 소개했다. “임원들은 ‘창조’가 아니라 ‘창의’로 하자고 했다. 김 회장은 완강히 ‘창조’를 고수했다. ‘창의는 아이디어일 뿐이다. 아이디어에서 그칠 게 아니라 뭔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논리였다.”

다른 대우맨들의 80, 90년대 회고담 역시 ‘도전’으로 점철됐다. “일찌감치 진출했던 아프리카 수단에서는 쿠데타가 수시로 일어났다. 그때마다 대우 현지 지사장이 잡혔다가 풀려났다. 그러더니 나중엔 정변이 일어나도 대우는 건드리지 않았다. 누구 편드는 게 아니라 꾸준히 수단에서 일하는 기업이라는 인식이 박혀서였다. 대우는 수교가 없었던 동유럽·아프리카에 먼저 들어갔다. 그게 발판이 돼 수교가 이뤄졌다고 자부한다.”(김종도 전 GM대우 전무·65)

“90년대 초반 남미는 일본 판이었다. 페루에서는 일본계 대통령이 나오지 않았나. 전자제품과 자동차는 일본 일색이었다. 거리엔 일본 음식점과 가라오케가 넘쳤다. 거기에 전자·자동차를 들고 들어갔다. 특히 AS에 신경 썼다. 일본 차는 수리 신청을 하고 1주일 이상 기다려야 했는데, 우리는 바로바로 했다. 시장을 확보하면서 한국 문화도 퍼졌다. 대우는 그렇게 일본을 지워 나갔다.”(백기승 전 대우 이사·62)

80년대에 대우는 노사분규를 겪었다. 홍영표(62)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위장 취업해 분규를 이끌었다(홍 의원은 10일 빈소를 찾았다). 그런데 김 회장의 반응이 뜻밖이었다고 한다. “운동권은 자기를 희생하고 도전한다. 대우의 정신이다. 다만, 경험이 부족하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좁다. 노동운동하게 두지 말고 기업의 인재로 키워보자.” 결국 파업을 주동했던 홍 의원은 해외 주재원으로 일하게 된다.

빈소를 찾은 김태구 전 대우자동차 사장. [연합뉴스]

빈소를 찾은 김태구 전 대우자동차 사장. [연합뉴스]

90년대 초반에는 아예 운동권 출신 40명을 특채했다. 대학 시절 수감됐던 A(57)씨도 김 회장의 독특한(?) 철학 덕에 대우에 입사했다. “취직하려는 데 대기업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대우에서는 면접이 끝나자 담당 임원이 손을 잡고서 ‘함께 일해보자’고 했다. 그래도 김우중 회장 개인과 ‘재벌’에 대한 생각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한 사건이 있었다. 회장과 젊은 사원들의 대화에서 누군가 되바라진 질문을 했다. ‘회장님께서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데, 도대체 얼마나 벌어야 그만 일할 것이냐’고 했다. 회장이 웃으며 되물었다. ‘자네는 얼마나 있어야 하겠나.’ ‘50억원쯤이요?’ ‘난 그보다 더 많이 벌었다네. 그래도 일하지. 왠지 아나. 세상에 도움되는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걸로 돈 벌어 국가에 세금 내는 재미가 있어요. 그래서 일한다네.’ 듣는 순간 느꼈다. 탐욕이 아니구나. 기업가란 이런 것이구나.”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만일 김 회장이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면, 지금 정권을 잡은 386 운동권 출신들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B(65)씨와C(59)씨는 이구동성이었다. “운동권은 나라와 경제에 대한 생각이 80년대에 멈춰섰다. 여전히 시각이 좁다. 가능했다면 김 회장은 이들과 토론하고 어떻게든 외국으로 끌어내 공부하고 경험하게 했을 거다. 시각을 넓혀주려 했을 것이다.”

대우맨들은 그룹 해체에 대해 진한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외환위기 때 김 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장으로 정부에 맞섰던 ‘괘씸죄’를 샀다는 것이다. 백기승 전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외환위기 때 전경련 회의를 마치고서였다. 회장님께서 나 보고 차에 같이 타라고 했다. 그러고선 말했다. ‘전경련 회장 괜히 한 것 같다. 회사가 압박을 받는다.’ 결국 그룹이 해체됐다. 대우가 갖고 있던 폴란드 바르샤바의 300만 평 공장, 체코 프라하의 100만 평도 날아갔다. 지금은 돈을 아무리 많이 싸 들고 가도 살 수 없는 땅이다.”

김 전 회장에 대한 평은 엇갈린다. 도전 정신의 표상이었으나 법원은 그에게 부실 경영의 책임을 물어 징역 8년 6개월에 추징금 18조원을 선고했다. 졸지에 직장을 잃은 대우맨 수만 명은 김 회장에게 서운하지 않았을까. 운동권 출신 B씨는 말했다. “서운함? 그렇다면 이렇게들 달려와 옛 얘기를 하겠는가. 우리가 가진 건 존경과 자랑스러움이다.”

해외 출장 옷 가방엔 깃 해진 와이셔츠

김우중 회장 비서였던 이승봉씨의 여권. 입국 스탬프 찍을 공간이 모자라 4년 동안 여권을 8번 갱신했다. [사진 이승봉씨]

김우중 회장 비서였던 이승봉씨의 여권. 입국 스탬프 찍을 공간이 모자라 4년 동안 여권을 8번 갱신했다. [사진 이승봉씨]

‘세계 경영’이 한창이던 1990년대 초·중반,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은 가끔 서울로 출장을 왔다. 1년에 280일을 해외에서 보내던 시절이어서 그룹 임직원들은 ‘서울 출장’이란 말을 썼다고 한다. 다음은 92~96년 비서로 김 회장을 수행했던 이승봉(62)씨의 회고담이다.

외국에 10일을 가든, 20일을 가든, 김 회장의 옷 가방 내용물은 똑같았다. 여분의 정장 두 벌, 셔츠 세 벌, 속옷 두 벌, 양말 세 켤레였다. 셔츠는 오래 입어 깃이 해졌다. 워낙 바쁘게 움직여야 해 호텔에 세탁을 맡길 수 없었다. 김 회장이 손수 양말을 빨아 신기도 했다. 수행비서로서 민망했다. 그다음부터는 눈치껏 양말을 벗을 것 같을 때 곁에 있다가 얼른 주워 나와 빨았다. 셔츠는 오래 입어 깃이 해졌다.

음식이 도저히 입에 맞지 않거나, 오랜 출장으로 물릴 때를 생각해 라면·김치·깻잎 등을 가져갔다. 짐 부피 때문에 많이 가져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라면 드시는 모습을 함께 간 임원들이 부러운 눈으로 침 흘리며 지켜보기도 했다.

감동적인 순간도 있었다. 92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김병화 농장에 갔을 때였다.

입구에서 한복 입은 할머니 50여 분이 ‘아리랑’을 부르며 우리를 맞았다. 김 회장은 일일이 할머니들 손을 잡았다. 그러곤 김병화 농장의 고려인 2000여 가구에 대우전자 컬러TV를 한 대씩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홍보 효과도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소식을 듣고서 터키계 등 농장에서 함께 지내던 다른 민족들이 “우리는 왜 빼느냐”고 했다. 결국 TV 500대를 더 전달했다.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