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현상 논설위원이 간다

“철도 신설 검토” 한마디에 찢어진 수도권 서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총선 겨냥한 선심성 논란 GTX-D

최기주 대도시권광역교통위원장이 지난 10월 3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대도시권 광역교통 비전 2030’ 행사에서 광역교통 비전을 발표하고 있다. 대광위는 이날 수도권 서부의 교통망 개선을 위해 광역급행철도 신설 계획을 밝혔다. [연합뉴스]

최기주 대도시권광역교통위원장이 지난 10월 3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대도시권 광역교통 비전 2030’ 행사에서 광역교통 비전을 발표하고 있다. 대광위는 이날 수도권 서부의 교통망 개선을 위해 광역급행철도 신설 계획을 밝혔다. [연합뉴스]

“박남춘 인천시장은 GTX-D 노선에서 청라를 더는 언급하지 말라. GTX 유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검단 주민은 김포 시민과 더불어 박 시장 퇴진 운동은 물론 반(反)민주당 운동에 뛰어들 수 있다.”(검단주민총연합)

검단·청라 주민 벌써부터 신경전 #정치인들도 저마다 숟가락 얹기 #‘최소한 15년 소요’에 변수도 많아 #‘희망 고문’ 그치지 않을까 우려도

“GTX-D 노선에서 청라를 언급하지 말 것을 선언하라는 요구는 적절하지 않다. 인접 지역끼리 상생 정신에도 어긋난다. 우리도 광역 교통망이 절대 필요하므로 GTX-D 유치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청라국제도시총연합회)

정부가 던진 광역 급행 철도 GTX 약속이 인천 서부권과 김포 등 수도권 북서부 일대를 흔들고 있다. 구체성은 전혀 갖추지 않은 채 총선을 앞두고 슬쩍 흘린 안(案)에 관련 지역 주민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민민(民民) 갈등까지 벌어지고 있다. 내년 총선을 노리는 지역 기반 정치인들도 저마다 유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판에 “냉정을 찾자”고 말할 정치인은 물론 없다.

갈라진 인천 서부권

지난 10월 31일 국토교통부 대도시권광역교통위원회(대광위)는 ‘광역교통 2030 비전’을 발표하면서 수도권 서부권에 신규 급행 철도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 노선 계획도 없는 막연한 발표였다. 예상 노선을 놓고 김칫국 마시기가 시작됐다. 김포·청라·검단·계양지구 등의 부동산 카페가 가장 먼저 움직였고, 정치인들이 가세했다. 카페마다 희망 섞인 예상 노선도가 올라오고 있고, ‘부동산 전문가’들은 GTX가 집값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느라 바쁘다.

갈등의 발단은 지난달 22일 인천시가 내놓은 ‘미래이음 2030 종합 비전’ 첨부 자료였다. GTX-D 출발지 권역을 표시한 원에 청라지구와 루원시티(청라 옆 미니신도시)는 포함됐지만, 검단신도시는 살짝 벗어나 있었다. 검단 주민들이 들끓었다. 예민한 반응에는 이유가 있다. 검단지구 부동산 시장은 올봄까지 미분양이 쌓이는 등 침체에 시달리다 9월에야 미분양이 해소되는 등 겨우 살아나는 분위기다. 그러나 최근 재개된 분양 신청에서는 3개 단지에서 1순위 미달이 나오는 등 침체 공포는 가시지 않고 있다. “주민단체가 다소 과격한 표현의 성명서를 낸 것은 GTX에 그만큼 기대를 걸고 있다는 방증 아니겠는가.” 검단지역의 한 부동산 업자가 전한 분위기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청라지구도 사정이 느긋하지는 않다. 7호선 연장 계획 등으로 서울 접근성이 다소 나아질 것으로 기대되지만, 여전히 긴 출퇴근 시간이 문제다. 결국 검단과 청라 두 지역 모두 GTX는 놓칠 수 없는 희망의 끈이다. 인천시는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인천시 관계자는 “노선과 관련해 특정 지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거나 검토한 사실이 전혀 없다”면서 “오해가 없도록 지도에 큰 원으로 표기했는데 오해를 빚었다”고 설명했다.

일부에서는 인천시가 검단-청라-계양을 잇는 노선을 정부에 건의할 것으로 점치고 있다. 하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 효율성과 지방자치단체 간 균형에도 문제가 생긴다. 무엇보다 노선에서 배제되는 김포 주민들이 가만있을 리 없다. 김포 부동산 카페 등에선 “혹시나 인천 위주로 노선이 그어질 경우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올라오고 있다.

주민 관심이 집중된 뜨거운 이슈를 총선을 앞둔 정치인들이 놓칠 리 없다. 지난달 27일 열린 인천언론인클럽 주최 4당 토론회. 민주당 박찬대 의원, 한국당 이학재 의원, 정의당 이정미 의원, 바른미래당 이수봉 인천시당 위원장이 토론자로 나섰다. 지역 현안에 다른 목소리를 내던 네 사람이지만, GTX-D 유치에 대해선 하나같이 일치했다. 막대한 재정적자까지 고려한 진지한 대안이 나와야 한다는 지적이 있긴 했으나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정치인마다 "우리 지역 우선”

더불어민주당 김포을과 하남 지역위원회는 지난 3일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GTX-D의 김포~하남 연결을 주장했다. 김준현 김포을 위원장은 “2기 신도시인 김포와 검단, 근처 예정 중인 3기 신도시(인천 계양, 부천 대장)까지 합하면 광역 서부권 인구는 100만명에 육박하게 된다”며 “이 일대 교통 수요에 대응하려면 GTX 김포 노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최종윤 하남 위원장도 “미사·위례·감일 신도시 개발 등으로 하남 일대 인구는 전국 최고 수준의 인구 증가율을 보인다”며 GTX 유치를 촉구했다.

지역구 내에 청라지구가 있는 한국당 이학재 의원(인천 서구갑)은 입장이 다르다. 이 의원은 같은 날 저녁 열린 시민토론회에서 “GTX-D 노선은 인천공항과 영종·청라 등 국제도시, 루원시티, 계양지구로 이어지는 축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를 최우선으로 고려해 결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이재훈 한국교통연구원 박사는 "GTX-D 노선이 계양지구에서 분기해 검단·김포와 청라·영종 둘 다 연결해야 한다”고 주장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현실성은 떨어진다는 것이 중론이다.

GTX 유치에 따른 생색내기도 한창이다. 인천 송도를 지나는 GTX-B 노선이 지난 7월 예비타당성을 통과하자 남동구·연수구 등 인천 지역 의원들은 저마다 자축 메시지를 냈다. 야당인 자유한국당 민경욱(연수구을) 의원마저 “국토부에 조속히 서둘러줄 것을 협의하고 당부했다”며 숟가락을 얹었다. 반면 GTX 노선에서 소외된 미추홀구갑 지역구의 홍일표 의원(한국당)은 “GTX가 인천 전 도심을 사통팔달로 연결하는 주안역을 경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실화까지는 숱한 관문

"GTX가 추진된다고 하지만, 살아생전에 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검단지구에서 만난 한 주민의 헛웃음이다. 실제 GTX-D 노선이 현실화되려면 산 넘어 산이다.

GTX-D 현실화의 첫 단계는 우선 2021년 상반기 확정되는 제4차 국가철도망계획(2021~2030년)에 포함되는 일이다. 그래야 구체적인 노선과 예산이 정해진다. 이후 예비타당성 조사(예타)와 교통영향 평가, 환경영향 평가, 토지보상 심사 등 까마득한 관문을 차례로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노선이 바뀔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사업 자체가 좌초할 가능성도 있다. 이런 관문을 통과한 뒤에도 민자 적격성 심사를 거쳐 사업자를 찾아야 한다.

GTX 구상이 나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진척이 가장 빠른 GTX-A도 이제 겨우 첫 삽을 떴다. B와 C 노선은 이제 간신히 예타 통과 기준인 비용 대비 편익 비율(B/C) 1.0을 넘겼다. 그것도 노선을 연장하고, 주변에 들어설 신도시 수요까지 계산에 넣어 겨우 얻어낸 결과다. 예타를 넘기더라도 실제 사업성은 다른 문제다. 재무 적격성을 따져 실제 민간 사업자를 찾아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현재 GTX-D는 백지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문에 GTX-D 노선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해도 완공까지 최소 15년 정도는 걸릴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한 도시교통 전문가는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물론 재정 계획 하나도 마련돼 있지 않은 대광위 발표는 지역 주민들에게 희망 고문을 안겨줄 뿐”이라고 꼬집었다.

논란이 확대되자 정부와 대광위는 슬쩍 말을 돌리고 있다. 대광위 관계자는 "우린 GTX라고 발표한 적이 없다. 모든 가능성을 놓고 검토할 계획인 만큼 아직 구체적으로 답할 사안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같은 설명이 거짓이라곤 할 수는 없다. 대광위가 ‘광역교통 2030 비전’을 발표하던 날, "서부권 신규 급행 철도가 GTX-D를 말하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대광위 측은 시인도 부인도 않은 채 말을 흐렸다. 국토부 관계자도 "급행 철도와 같은 기능을 할 철도를 염두에 둔 것이지 확대 해석은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정부의 모호한 태도가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수도권 부동산 시장은 GTX 이슈를 연료 삼아 달아오르고 있다. 실체도 없는 GTX-D를 놓고 지역 사회는 벌써 갈등과 분열에 빠져들고 있다. 정부가 하루빨리 명확한 방침과 계획을 밝혀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