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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한 통도 안 왔어" 이 순간 고독한 아빠를 위해 할 일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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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9)

“휴대폰만 보면 나는 죽은 사람이다.”
툭 던지듯 하시는 말씀이 섬뜩할 때가 있다. 요즘 전화가 잘 안 온다는 아버지 식 표현이다. 보청기 껴도 쉽지 않은 것이 전화 통화이기에 사정을 아는 이들은 나에게 대신 전화를 건다. 함께 사는 나도 아버지가 기억하셔야 할 중요 정보는 주로 문자 메시지로 남긴다. 그러니 통화는 점점 줄고 문자 메시지만 쌓인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지워 달라 하셔서 보면, 누가 돌아가셨다는 부고 안내가 대부분이다. 함께 일했던 동료, 친구들의 사망 소식을 매일 받는 것도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게다.

퇴근하고 돌아와 시작되는 대화도 대부분 전화에 대한 얘기다. 오늘은 누가 전화했더라, 누구는 요즘 통 전화가 안 온다, 아직도 자기 장모 돌아가셨다고 부고장 보내는 사람이 있다, 웃어른 행사 초대를 문자로 보내는 건 오라는 얘기냐 오지 말라는 얘기냐, 등등. 어떤 얘기엔 못 들은 척 넘어가고, 어떤 얘기엔 고개를 끄덕인다. 충분히 이해해줄 만한 일에 심하게 섭섭해하신다 싶을 땐, “아버지 귀가 어두우시니 통화가 어려워서 그럴 거예요”하며 편 들어주고도 싶지만 꾹 참는다. 어르신과의 대화에선 일단 공감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 좋다는 배움 때문이다.

"휴대폰만 보면 나는 죽은 사람이다." 요즘 전화가 잘 안온다는 아버지식 표현이다. [사진 pixabay]

"휴대폰만 보면 나는 죽은 사람이다." 요즘 전화가 잘 안온다는 아버지식 표현이다. [사진 pixabay]

그러나 이 말씀이 나올 땐 반사적으로 내 손이 움직인다. “오늘 전화가 한 통화도 안 왔어!”
대전과 강릉, 부산에 점조직으로 흩어져 있는 나의 조직원들에게 조용히 단체 문자를 보낸다.
“지금 상황 되는 사람, 아빠에게 전화 좀 걸어줘.” 딸들이 여럿이라 천만다행이다. 대전, 강릉, 부산에 흩어져 사는 언니들은 바로 능청스럽게 전화를 걸어온다. 각자 스타일은 다르다.

언니 1은 거의 매일, 시간을 정해 놓고 통화하는 유형이다.
“큰 애는 요즘 어디 학원 다닌다니?”
“네?”
“아무 용건도 없이 전화해서 어떻게 그렇게 이야기를 잘하냐?”
“무슨 얘기 나누셨는데요?”
“글쎄, 뭘 얘기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주제가 자연스럽더라. 전화 요금 많이 들 테니 내가 내줘야겠다.”

아버지도 다 아신다. 언니가 매일 아침 9시면 어김없이 전화하는 이유는 막내딸 출근 후 혼자 집에 계실 아버지 말동무를 해주고자 하는 마음이라는 걸. 그걸 알면서도 행여 전화가 안 온 날엔 “왜 오늘은 전화 안 하는지 물어봐라. 무슨 일 있나 보다” 하신다.

언니 2는 얼굴로 점수 따는 스타일이다. 강릉에 살지만 학교 강의 때문에 일주일에 두 번가량 서울에 오는데, 학교 오고 가는 길 잠깐이라도 집에 들러 수시로 얼굴도장을 찍는다. 몸도 아픈데 힘들다고, 차비 든다고 만류하는 아버지에게 “아빠 얼굴 보고 싶어 왔지!” 대 놓고 들이댄다. 오는 날은 온다고, 못 오는 날은 못 온다고 앞뒤로 문자 메시지를 날리는 통에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관심을 받는다.

“아주 성가셔! 오나 안 오나 아무것도 못 하고 기다리게 해.”나에게는 귀찮다 하시면서도 요일을 꼽아가며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다.

언니 3은 아직 분석이 끝나지 않은 연구과제다.
“아빠랑 둘이 있으면 무슨 얘기해?”
“같이 살면서 특별한 주제가 있나? 오늘 반찬 뭐 해 먹을까, 내일 병원 가야 하니 오늘은 일찍 자자, 뭐 그런 이야기지”

부산으로 시집간 언니 3은 유독 아빠와 통화를 힘들어한다. 얼굴 보고 이야기하면 훨씬 부드러울 텐데, 멀리 시집가 자주 오지 못하는 지리적 제약이 더해져 점점 더 어려워지는 듯하다.

남녀 관계도 자꾸 얼굴 보고 만나다 보면 정이 들듯 어색하더라도 꾸준히 서로 접촉하면 언니도 아버지도 좀 더 통화가 편안해지지 않을까. [사진 pixabay]

남녀 관계도 자꾸 얼굴 보고 만나다 보면 정이 들듯 어색하더라도 꾸준히 서로 접촉하면 언니도 아버지도 좀 더 통화가 편안해지지 않을까. [사진 pixabay]

언니 3이 전화하면 아빠는 대뜸 “어 그래, 왜 전화했냐?” 물으신단다. 그 말 한마디에 언니는 ‘자주 전화도 안 하는 네가 웬일이냐?’ 하는 원망으로 느끼고 ‘전화 괜히 했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왜 전화했냐?” 물으시니 뭔가 용건이 있어야 할 거 같은데, 가볍게 “잘 지내요!” 하면 나는 잘 지내면서 아빠는 안 챙기는 것 같고, “사실 이런 일이 있어요” 깊은 얘기를 하면 괜히 걱정 끼칠 것 같고.

그래서 궁색하게 내놓는 말이 “그냥 궁금해서요”란다. 그러면 아버진 본인 얘긴 않고 바로 “넌 어떻게 지내냐?” 또 물으시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지 말문이 막힌다고. 어물쩍 둘러대고 전화를 끊고 나면 다시 하기 망설여지고,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전화하면 아버지는 한층 굳어진 목소리로 “왜 전화했냐?”를 반복, 그야말로 악순환이 계속된다고. 단지 전화 통화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다 점점 마음의 거리까지 멀어질까 고민이란다.

통 전화가 없다고 섭섭해하는 아버지에게 언니 마음은 그렇지 않다 설명해 드리기도 하고, 아빠가 언니에 대해 칭찬하시는 것을 동영상으로 찍어 언니에게 보내보기도 했는데, 현재까지 결론은 ‘자주 하는 것’이 그래도 최선이다. 남녀 관계도 자꾸 얼굴 보고 만나다 보면 정이 들 듯이 좀 어색하더라도 꾸준히 서로 접촉하면 언니도 아버지도 좀 더 통화가 편안해지지 않을까. 오늘도 아빠를 슬슬 꼬셔본다.

“아빠, 언니가 요즘 좀 힘든 것 같아, 아빠가 전화해서 격려 좀 해주세요.”
그러면 아버지는 못 이기는 척 휴대폰을 만지작거리신다.
“그래, 우리 셋째 딸이 속은 제일 깊은 거 내가 알지”하시면서.

언니 3은 글을 읽고 울컥한 마음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원고 속 상황이 그대로 다시 한번 재연되었다. [사진 푸르미]

언니 3은 글을 읽고 울컥한 마음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원고 속 상황이 그대로 다시 한번 재연되었다. [사진 푸르미]

추신: 원고마감 전 언니들에게 양해를 구할 겸 원고 검토를 부탁했다. 언니 1은 자신이 그렇게 아버지와 자연스럽게 통화할 수 있는 건 돌아가신 시어머니와 쌓은 15년 내공의 결과임을 고백했다. 언니 3은 글을 읽고 울컥한 마음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원고 속 상황이 그대로 다시 한번 재연되었다는 웃픈 소식을 전해왔다. ㅜㅜ

공무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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