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 해 4만 명이 마시러 온다…'맥주 도시' 그랜드래피즈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황지혜의 방구석 맥주여행(31)

아침 일찍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서 출발해 피츠버그, 클리블랜드를 거쳐 달리다 보니 석양이 질 무렵 저 멀리 ‘비어 시티(Beer City)'라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곳은 미시간주에서 디트로이트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인 그랜드래피즈(Grand Rapids)다.

Beer city 표지판. [사진 황지혜]

Beer city 표지판. [사진 황지혜]

미국의 맥주 도시들

크래프트 맥주 종주국답게 미국에는 맥주 애호가들의 마음을 쿵쾅거리게 하는 자칭 타칭 맥주 도시들이 있다. 서부해안식(West Coast style) IPA(India Pale Ale)가 꽃을 피운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대규모 홉 산지를 기반으로 다채로운 맥주 문화가 자리 잡은 오리건주 포틀랜드, 미국 최대 맥주 축제이자 컨퍼런스가 열리는 콜로라도주 덴버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맥주 도시는 맥주 산업을 기반으로 경제를 키우는 한편 전 세계에서 맥주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7000개 이상의 양조장에서 맥주를 생산하고 맥주 투어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맥주 전문 호텔까지 성업하고 있는 미국에는 Beercation(beer+vacation)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그랜드래피즈는 시 정부 차원에서 스스로를 ‘비어 시티 USA’라 명명했다. 적극적인 맥주 마케팅을 펼치면서 이곳에는 한 해 4만 명 이상의 맥주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맥주 도시를 표방하는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랜드 래피즈는 1세기가 넘게 가구 산업을 기반으로 성장해왔다. 이런 그랜드 래피즈가 맥주 도시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1997년 파운더스 브루잉(Founders Brewing)이 문을 열어 큰 성공을 거두면서다. 파운더스 브루잉은 ‘내가 마시고 싶은 맥주를 마신다’는 (당시 기준) 도발적인 철학으로 품질 높은 맥주를 생산해 미국 전역에서 유명세를 얻었다.

내놓은 모든 맥주가 세계 최고 수준이어서 ‘믿고 마시는 파운더스’라고 불리는 이 양조장은 많은 소규모 양조장이 롤모델로 삼는 곳이다. 특히 KBS(Kentucky Breakfast Stout), CBS(Canadian Breakfast Stout)와 같은 독창적인 맥주로 다른 양조장들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을 구축했다.

파운더스 브루잉.

파운더스 브루잉.

siciliano's market.

siciliano's market.

파운더스 브루잉 창업 이후 20여년간 그랜드래피즈에 브루어리 비반트(Brewery Vivant), 홉캣(HopCat), 그랜드 래피즈 브루잉(Grand Rapids Brewing) 등 개성 있는 양조장들이 속속 생겨나 이제는 맥주 양조장이 80여개에 달한다. 또 미국 최고의 보틀숍으로 꼽히기도 한 시칠리아노스 마켓(Siciliano's Market) 역시 그랜드 래피즈를 맥주 도시로 알려지게 한 주인공이다. 그랜드 래피즈 인근 도시에는 벨스 브루어리(Bell's Brewery)라는 걸출한 양조장이 자리해 맥주 도시의 명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맥주 도시의 기반은 유수의 양조장들 노력으로 만들어졌지만 전 세계 관광객들이 주목하기까지는 그랜드 래피즈 시와 주민들의 조직적인 노력이 있었다. 그랜드 래피즈 시 당국은 맥주 관광객들을 위한 다양한 콘텐츠를 마련했다. 맥주 양조장 지도(Beer City Ale Trail)를 만들어 개별 관광객이 편하게 맥주 투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여권 모양의 책자(Beer City Brewsader Passport)를 배포해 모든 양조장을 찾아다니면서 도장을 채우게 했다. 받은 도장 개수에 따라 기념품 등이 제공됐다. 투어 업체, 소상공인, 숙박업소들도 가세했다. 그랜드 래피즈 맥주 투어, 비어 시티 러너 등 맥주 투어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마련됐고 여러 맥주 축제가 열렸다. 도시의 많은 호텔은 방 안에 맥주 탭을 설치하는 등 재미 요소를 더한 맥주 패키지를 제공했다.

여권 모양의 책자(Brewsader Passport).

여권 모양의 책자(Brewsader Passport).

Beer city ale trail. [사진 experience Grand Rapids]

Beer city ale trail. [사진 experience Grand Rapids]

매력 덩어리 그랜드래피즈

그랜드 래피즈의 매력은 맥주에 그치지 않는다. 맥주 여행지로 그랜드 래피즈를 선택했지만 그 이상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해외에서 한 번쯤 살아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곳이 그랜드 래피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너무 번잡하지 않으면서도 생활 기반이 잘 갖춰져 있었다. 여기에 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후손에 전하며 발전시켜 나가려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랜드 래피즈 퍼블릭 뮤지엄에는 도시의 역사, 과거 생활모습에서부터 한국인을 비롯한 여러 이민자의 정착사가 잘 정리돼 있었다. 남녀노소의 흥미를 일으키는 우주 비행선 체험까지 있어 모든 부분을 만족하게 해주는, 작지만 알찬 박물관이었다.

또 그랜드래피즈 출신 대통령인 제럴드 R. 포드 대통령 기념박물관에서는 혼돈의 시대에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권력을 내려놓은 리더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랜드 래피즈에 뿌리를 둔 글로벌 기업 암웨이가 2년에 한 번씩 온 거리를 미술관으로 만드는 아트 프라이즈를 개최한다는 사실도 인상적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랜드 래피즈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 것은 ‘서울 마켓’이라는 한식당 겸 슈퍼마켓이었다. 한국의 작은 분식집 같은 분위기에 곳에 비빔밥, 제육볶음부터 육개장, 짬뽕까지 없는 메뉴가 없었다. 맛 역시 한국의 어느 식당에도 뒤지지 않았다. 한식을 위한 식재료, 각종 주전부리도 판매한다. 이렇게 맥주, 문화, 한식을 통해 그랜드래피즈는 또 가고 싶은 도시로 마음에 남았다.

비플랫 대표·비어포스트 객원에디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