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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당정 “꼭 통과” 약속한 어린이안전법안, 제대로 논의는 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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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 어린이교통안전 강화 대책 마련을 위한 당·정협의가 열린 이곳에 최근 잇단 교통안전 사고로 희생된 아이들의 부모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회의 시작 전 어린이교통안전 법안의 조속한 국회 통과 촉구서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에게 전달했다. 아이들의 사진을 든 부모들은 기자들에게 “사고 뒤 3년이 넘었는데도 지속적으로 아이들이 말도 안 되는 사고를 당하는 상황”이라며 눈가를 훔쳤다. 윤관석 민주당 정책위 수석부의장은 “꼭 통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어린이 교통안전 강화 대책 당정협의'가 26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렸다. 태호와 해인이 가족이 이인영 원내대표에게 법안 통과 촉구서를 전달하고 있다. 왼쪽은 전혜숙 국회 행정안전위원장.    임현동 기자

'어린이 교통안전 강화 대책 당정협의'가 26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렸다. 태호와 해인이 가족이 이인영 원내대표에게 법안 통과 촉구서를 전달하고 있다. 왼쪽은 전혜숙 국회 행정안전위원장. 임현동 기자

어두운 분위기 속에 진행된 이날 회의에서는 어린이보호구역 내 과속 단속 카메라와 신호등을 설치하기 위해 내년도 예산안에 1000억원 규모의 예산을 증액해 편성하는 방안이 마련됐다. 어린이보호구역 내 CC(폐쇄회로)TV 설치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은 ‘민식이법’(도로교통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강훈식 의원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안조정소위에서 줄곧 주장해 왔던 내용이다.

당·정은 또 어린이보호구역 사업대상 지역을 올해 351개소에서 50% 이상 늘리고, 향후 3년 동안 어린이보호구역 내 무인카메라(8800대)·신호등(1만1260개)·과속방지턱 등도 확충하기로 했다. 초등학교 주변 어린이보호구역의 교통환경 개선 사업비를 지방재정교부금을 통해 지원하고, 불법 주정차 주민 신고 대상 지역에 어린이보호구역을 포함키로 했다. 정기적인 합동점검으로 통학버스 운영자들의 안전관리를 강화하고, 신고의무대상을 확대하는 내용도 담았다.

관련 법 개정 논의도 이뤄졌다. 현재 국회에는 민식이법 외에도 ‘한음이법’ ‘하준이법’ ‘해인이법’ ‘태호·유찬이법’ 등이 계류 중이다.

'어린이 교통안전 강화 대책 당정협의'가 26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렸다.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은 태호 해인이 부모들이 법안 통과를 촉구하며 회의를 지켜보고 있다.    임현동 기자

'어린이 교통안전 강화 대책 당정협의'가 26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렸다.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은 태호 해인이 부모들이 법안 통과를 촉구하며 회의를 지켜보고 있다. 임현동 기자

한음이법 2건 중 어린이통학버스에 ‘잠든 어린이 확인 장치’ 설치를 의무화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은 2018년 9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어린이통학버스 내 영상정보기기 설치를 의무화하고 안전교육을 받지 않은 운영자·운전자에 대한 처벌을 과태료에서 징역형 또는 벌금형으로 바꾸는 도로교통법 개정안(2016년 8월 발의)은 행정안전위 소위에 상정만 됐을 뿐이다. 하준이법은 주차 시 안전 조치 의무를 부과하는 주차장법 개정안 2건(지난해 1월, 올해 7월 발의)인데 법제사법위·국토교통위에 머물러 있다.

해인이법은 어린이 안전사고 발생시 어린이 이용시설 종사자와 관리자에게 응급조치 의무를 부여하는 어린이안전기본법(올해 8월 발의)이다. 태호·유찬이법은 어린이를 탑승시켜 운행하는 모든 차량을 신고·등록하도록 해 운행기록 장치 설치를 의무화하고, 축구클럽 등 체육시설이용교습업도 어린이 통학 안전 의무를 준수토록 하는 도로교통법·체육시설법 개정안(올해 5월, 6월 발의)이다. 두 법안은 소관 상임위인 행안위와 문화체육관광위 소위에서 논의조차 안 됐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에서 열린 '국민이 묻는다, 2019 국민과의 대화'에서 고(故) 김민식 군의 부모 등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질문하기 위해 아이의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9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에서 열린 '국민이 묻는다, 2019 국민과의 대화'에서 고(故) 김민식 군의 부모 등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질문하기 위해 아이의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일 민식이법의 조속한 국회 통과를 주문했다. 그러자 국회는 하루 만인 지난 21일 행안위 법안소위를 열고 민식이법을 의결했다. 비슷한 내용의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묶어 일부 수정해 위원회 대안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어린이교통안전을 위한 법안의 신속한 논의 필요성은 여야 모두가 동의했으나, ‘원포인트’ 논의 과정에서는 다소 잡음이 있었다. 당일 소위에서는 비판과 자성이 뒤섞였다.

▶홍문표 자유한국당 의원=“저는 이 법에 대해서는 찬성한다는 전제에 말씀을 드린다. 대통령이 엊그저께 한 ‘국민과의 대화’에서 이 문제가 급부상 돼서 오늘 이렇게 직결로 처리가 된다면 국회가 뭐하러 존재하나. 절차와 순서가 이렇게 무시돼 가지고 하는 것은 저는 유감스럽다는 말씀을 드린다.”
▶김민기 민주당 의원=“이 법안이 대통령 말씀 하나에 없던 법안을 바로 만들어서 바로 상정해서 지금 논의한다 이렇게 여겨질 수가 있지만, (중략) 우리 국회에서 더디게 진행됐던 것은 맞다. 오히려 국회가 직무를 좀 더디게 한 것이다.”

이정미 정의당 의원 및 하준이, 태호, 해인이 가족들이 지난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토교통위원회 교통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의원들에게 어린이생명안전법 및 주차장법 일부개정법률안 국회통과 촉구 의견서를 전달하고 있다. [뉴스1]

이정미 정의당 의원 및 하준이, 태호, 해인이 가족들이 지난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토교통위원회 교통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의원들에게 어린이생명안전법 및 주차장법 일부개정법률안 국회통과 촉구 의견서를 전달하고 있다. [뉴스1]

민식이법은 그나마 다행히 논의를 거쳐 27일 행안위 전체회의에서 통과될 예정이다.

아직 소위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다른 법안들의 운명은 크게 보면 둘 중 하나가 될 터이다. 차일피일 소위 일정을 미루거나 잡지 못한 채로 있다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되거나, 대통령이든 여론에 떼밀려 충분한 논의 없이 부랴부랴 처리되거나다. ‘디테일에 악마를 남기는’ 입법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실제 한음이법의 경우 “안전교육 미수강자에 대한 징역형 부과는 지나친 측면이 있고, 영상정보기기 설치와 비슷한 목적의 장치 설치가 이미 ‘자동차관리법’에 따라 시행령에 규정돼 있다”는 내용의 검토보고서가 제출됐다. 태호·유찬이법 중 도로교통법 개정안 일부는 아예 검토보고서도 없어 법안 취지와 다른 부작용에 대한 심도 있는 토의가 이뤄지지 못한 상황이다.

법안은 필요하다. 그러나 어린이교통안전 사고의 재발 방지를 위해선 ‘제대로 된’ 법안 정비가 필요하다. 여야 의원들이 그간 자당(自黨)의 밥그릇 싸움인 선거제도 개정과 대통령 1호 공약인 검찰개혁 찬반에 쏟았던 열정의 반의반이라도 어린이교통안전 법안 논의에 투입했다면, 부모들이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사진을 들고 생계를 뒤로 한 채 여의도를 배회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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