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문희철의 졸음쉼터

그랜저가 말하는 성공에 관하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문희철 기자 중앙일보 기자
신형 그랜저 광고 캠페인 '성공에 관하여'에서 '동창회' 편. [유튜브 캡쳐]

신형 그랜저 광고 캠페인 '성공에 관하여'에서 '동창회' 편. [유튜브 캡쳐]

현대자동차가 19일 준대형세단 그랜저 부분변경 모델을 출시했다. 전면부 라디에이터그릴 디자인보다 더 인상적인 건 같은 날 공개한 ‘성공에 관하여’라는 기이한 그랜저 광고 캠페인이다.

신형 그랜저 캠퍼인 '유튜버' 편에서 어머니는 아들의 직업(유튜버)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다가 아들이 그랜저를 타고 나타나자 두 팔 벌려 자동차를 환영한다. [유튜브 캡쳐]

신형 그랜저 캠퍼인 '유튜버' 편에서 어머니는 아들의 직업(유튜버)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다가 아들이 그랜저를 타고 나타나자 두 팔 벌려 자동차를 환영한다. [유튜브 캡쳐]

안전·편안함·혁신·이동수단 등 자동차가 내포한 다양한 함의 중에서 그랜저는 ‘성공’이라는 키워드를 앞세웠다. 그런데 키워드를 보여주는 방식이 야릇하다. 광고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은 하나같이 물질주의적 잣대로만 성공을 평가한다.

‘유튜버’ 편에서 엄마는 아들의 직업(유튜버)을 못난 짓으로 생각하지만 아들이 몰고 온 그랜저를 보자마자 ‘성공했다’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퇴사하는 날’ 편에선 직장동료가 창업하려고 퇴사하자 다 같이 비웃다가, 그랜저를 타고 떠나자 시기심을 감추지 못한다. ‘동창회’ 편에선 임원으로 승진한 동창이 수입차를 안 사는 걸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법인차(그랜저)를 끌면서 이날 모임 비용을 결제하겠다고 말하자 ‘언니!’라고 소리치며 진심으로 존경한다.

신형 그랜저 광고 캠페인 '퇴사하는날' 편. [유튜브 캡쳐]

신형 그랜저 광고 캠페인 '퇴사하는날' 편. [유튜브 캡쳐]

어머니가 나라는 사람의 내면과 내가 좋아하는 직업보다 내 차를 보고 성공을 판단한다면 얼마나 슬플까. 유튜버는 그렇게 부끄러운 직업일까. 안정적인 직장을 떠나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데 여태 한솥밥 먹던 상사·동료는 왜 손가락질 할까. 승진하면 당연히 차부터 바꿔야 할까. 차가 볼품없으면 볼품없는 인간인가. 나도 누군가에게 아들이자 선후배이자 월급쟁이이자 친구인데. 경차 끄는 나를 현대차는 뒤에서 그렇게 비웃고 있었구나.

신형 그랜저 캠페인. [유튜브 캡쳐]

신형 그랜저 캠페인. [유튜브 캡쳐]

돈 벌면 성공한다. 성공하면 차부터 바꿔야 남들이 알아준다. 그랜저 뽑으면 대접이 달라지더라. 솔직히 누구나 한 번쯤 느꼈던 감정이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선을 지키며 살자고 다짐하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다. 그랜저가 보여준 가치관은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장삼이사를 우울하게 한다.

그랜저는 32년 동안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 세단이다. 한국차를 대표하는 현대차, 현대차를 대표하는 그랜저는 긴 세월 우아한 가치를 꽤나 창출했다. 그런데 이번 광고 캠페인만 보면 그랜저는 갑자기 돈벼락 맞은 졸부가 거머쥔 성공의 상징이다. 성공의 부정적인 이면을 저차원적으로 자극하는 모습에서 도무지 우아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절대다수를 속물로 격하하고 빈부·계층 갈등을 조장하는 행태는 우아한 고급 세단을 지향하는 차량과 어울리지 않는다.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문희철의 졸음쉼터

※'문희철의 졸음쉼터'는 중앙일보가 연재하는 자동차를 주제로 한 에세이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