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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회의 갈 이유 못찾아"···北, 文친서 공개하며 불만표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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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은 지난 18일 김 위원장이 함경북도 경성군의 중평남새온실농장과 양묘장 건설장을 시찰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사진.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은 지난 18일 김 위원장이 함경북도 경성군의 중평남새온실농장과 양묘장 건설장을 시찰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공개한 사진.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오는 25일 부산에서 열리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초청하는 친서를 보냈다고 북한이 21일 공개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모든 일에는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지난 11월 5일 남조선의 문재인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께서 이번 특별수뇌자회의(특별정상회의)에 참석해주실 것을 간절히 초청하는 친서를 정중히 보내왔다”고 밝혔다.
통신은 “친서가 국무위원회 위원장에 대한 진정으로 되는 신뢰심과 곡진한 기대가 담긴 초청이라면 고맙게 생각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며 “남측의 기대와 성의는 고맙지만 국무위원회 위원장께서 부산에 나가셔야 할 합당한 이유를 끝끝내 찾아내지 못한데 대해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판문점과 평양, 백두산에서 한 약속이 하나도 실현된 것이 없는 지금의 시점에 형식뿐인 북남수뇌상봉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라면서다.

미국과는 지소미아·방위비 충돌 #북한은 '상대 않겠다' 으름장

비공개로 전달된 정상 간 친서를 상대방의 동의 없이 공개하는 것은 외교적 결례다. 통신은 “문 대통령의 친서가 온 후에도 몇 차례나 국무위원회 위원장께서 못 오신다면 특사라도 방문하게 해달라는 간절한 청을 보내왔다”고 보도해 마치 정부가 북한에 매달리는 듯한 뉘앙스까지 풍겼다. 또 문 대통령 친서에 대해 김정은 위원장의 답신이 아닌, 조선중앙통신이라는 관영 매체 보도로 입장을 밝혀 이중 결례를 초래했다.

이 때문에 북한이 친서 공개로 한국 정부에 대한 불만을 대놓고 드러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재개와 관련해 정부를 압박했다는 지적이다.

통신은 “남조선 당국도 북남 사이에 제기되는 모든 문제를 민족 공조가 아닌 외세 의존으로 풀어나가려는 그릇된 입장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엄연한 현실”이라며 “지금 이 순간조차 통일부 장관이라는 사람은 북남관계 문제를 들고 미국에로의 구걸 행각에 올랐다니 애당초 자주성도 독자성도 없이 모든 것을 외세의 손탁에 전적으로 떠넘기고 있는 상대와 마주 앉아 무엇을 논의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겠는가”라고 주장했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20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와 금강산 관광 문제를 논의했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김정은 위원장이 올해 신년사에서도 개성공단·금강산 관광 재개 지시를 했는데 연말이 되도록 성과가 없다”며 “북한 최고지도자의 ‘무오류성’에 흠집이 난 것으로, 남북관계를 미국 눈치보지 말고 독자적으로 나서란 압박”이라고 해석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주최하는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환영만찬에 국내 각계 인사와 아세안 10개국 정상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주최하는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환영만찬에 국내 각계 인사와 아세안 10개국 정상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연합뉴스]

북한의 친서 공개는 남한을 상대하지 않고 미국과 직거래하겠다는 대외 선언의 성격도 담겼다. 통신은 “모처럼 찾아왔던 화해와 협력의 훈풍을 흔적도 없이 날려 보내고 있는데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는 남조선 당국이 종이 한장의 초청으로, 조성된 험악한 상태를 손바닥 뒤집듯이 가볍게 바꿀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보다 더한 오산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은 지난해 북·미 가교 역할을 했지만 지난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입지가 크게 축소됐다. 북·미는 두 차례 정상회담으로 직거래 채널이 가동되고 있는데, 북한이 이번 친서 공개로 한국을 상대하지 않겠다는 결기를 또 보여줘 중재자 입지가 더욱 위축됐다. 여기에 미국과 방위비 분담금,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된 상황이라 정부는 미국과 북한 모두에서 압박받는 ‘이중고’에 놓인 형국이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북한은 미국과 비핵화 협상이 풀리지 않으면 남북관계도 힘들 것으로 보는 것 같다”며 “한국을 배제한 채 대미 직거래로 현안을 풀려는 태도가 굳어질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북한이 이날 공개한 친서 관련 “문 대통령 모친 별세 즈음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조문에 대해 11월 5일 답신을 보냈다”며 이 서한에서 김 위원장을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초청한 사실을 밝혔다. 지난 10월 말 판문점에서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이 김 위원장의 조문을 받은 점을 미뤄볼 때 11월 5일 답신도 윤 실장이 나섰을 것으로 관측된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서면 브리핑에서 북한의 불참 통보에 대해 “김 위원장이 문 대통령과 함께 평화번영을 위해 아세안 10개국 정상과 자리를 같이하는 쉽지 않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게 된 데 대해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 초청 친서를 보낸 5일은 정부가 동료 선원 16명을 살해한 혐의로 북한 남성 2명을 강제 북송하겠다는 의사를 북측에 전달한 날이란 점에서 비판도 나온다. 정부는 이틀 뒤인 7일 북한 남성 2명에 대해 사상 첫 추방 조치를 취했다. 자유한국당은 논평을 내고 “정부가 북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은 물론, 탈북 선원 강제북송 의사 타진까지 나서며 (김 위원장의 한·아세안정상회의) 참석을 유도한 것 아니냐는 합리적인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윤건영 정상회담준비위 종합상황실장이 20일 오후 춘추관에서 핫라인 개통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윤건영 정상회담준비위 종합상황실장이 20일 오후 춘추관에서 핫라인 개통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백민정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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