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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퍼스펙티브

시장의 복수…“한국 경제에 먹을 게 없어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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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먹튀 논란’마저 사치라는데… 

지난 30년간 서울에서 일한 글로벌 금융 CEO의 이야기다. “박근혜의 창조경제나 문재인의 평화경제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국제 자본이 한국 경제에 완전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JP모간자산운용코리아는 한국에서 11년 만에 펀드 사업을 접었다. 임직원도 절반 가까이 줄였다. 스위스 투자은행인 UBS 역시 보유 중이던 하나UBS자산운용의 지분을 매각했다. 그는 “한때 외국 자본에 ‘먹튀’라고 비난했지만 이제는 오라고 해도 오지 않는다. 아예 먹을 게 없어졌기 때문이다.” 먹튀 논란도 사치스러울 만큼 한국 경제가 시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저성장·저금리로 외국계 엑소더스 #소득주도 성장 실패와 시장 역습 #문 정부, 정책 전환 대신 ‘마이 웨이’ #위기 인정해야 위기를 극복한다

요즘 외국 돈줄의 ‘한국 엑소더스(대탈출)’가 대세다. 최근 2년 사이에 골드만삭스·바클레이스·맥쿼리은행 등이 줄줄이 서울지점을 폐쇄하고 떠났다. 한때 해외 본사에서 낮은 금리에 차입한 달러를 굴려 재미를 보았지만 한국에도 저성장과 저금리가 굳어지면서 설 자리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황금알을 낳을 경쟁력 있는 산업이나 기업도 찾기 어려워졌다. 덩달아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차가워지고 있다. 그 결과 한국기업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해외직접투자는 올 상반기 150억 달러를 넘는 등 연일 사상 최대를 기록하고 국내로 들어오는 외국인 직접투자는 100억 달러 이하로 게걸음 치고 있다.

심각한 만성 질환 앓는 한국 경제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문재인 대통령은 그제 임기 2년 반 동안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웠다”고 자랑했지만 적어도 경제 분야에선 정반대다. 멀쩡했던 경제가 무너져내리는 징조가 뚜렷하다. 성장률이 1%대로 떨어지는 등 주요 경제 지표가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악 수준으로 주저앉았다. 정부는 미·중 무역마찰 등 외부환경을 탓하지만 문제는 내부에 도사리고 있다. 지금은 기준 금리 1.25%로 역사상 최저인 데다 올해 469조9000억원(전년 대비 9.5% 증가)의 수퍼 예산이 투하되고 있다. 원화도 달러당 1165원의 고환율이다. 예전 같으면 수출이 폭발하고 성장률도 가파르게 치솟았을 환경이다. 그런데도 11개월 연속 수출이 전년동기 대비 감소하고, 설비 투자 역시 6분기 연속 마이너스 행진에다 성장률마저 곤두박질했다. 이는 한국 경제가 심각한 만성질환을 앓고 있음을 의미한다.

왜 이런 비극적인 수치가 나올까.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생산성 향상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으로 인해 기업 부담이 늘어 경쟁력이 떨어지고 다시 일자리가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졌다”며 “경제 주체의 의지를 죽여 시장의 활력을 떨어뜨린 점이 현 정부가 가장 잘못한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정책 실패에 따른 시장의 복수라는 것이다.

일자리 정부에서 비정규직이 급증한 것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통계 기준을 바꿨기 때문”이라지만 경제전문가 사이에선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최저임금 부담을 피하기 위한 알바 쪼개기로 17시간 미만 단시간 근로자들이 늘고 정부가 돈을 퍼부어 만든 노인 일자리도 모두 비정규직이기 때문이다. 현 정부가 자랑해온 고용원이 있는 자영업자가 감소한 것도 시장의 역습에 따라 혼자나 가족끼리 영업하는 경우가 급증한 탓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나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내외 전문기관들은 한국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주요 산업의 국제경쟁력 하락으로 지목한다. 고부가가치의 첨단 산업은 선진국을 못 따라잡은 상태에서 중후장대 산업은 중국의 추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정책이 구조개혁을 외면하고 분배에 치우치면서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생산성 하락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무디스와 S&P 등 신용평가기관들도 현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주 52시간 근로제·법인세 인상·강성노조·과도한 복지 확대로 실물 경제가 장기적 저성장으로 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정부는 재정 살포에만 매달리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를 위해 자신의 발언까지 뒤집어 버렸다. 문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를 향해 “22조짜리 4대강 사업의 예비타당성 조사를 생략해 환경 재앙과 국민 혈세 낭비만 초래했다”며 맹비난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은 50조짜리 도시재생 뉴딜 사업, 그리고 100조가 넘는 토건 사업까지 예타를 무시하라며 밀어붙이고 있다. 대통령은 한발 더 나아가 “지금 재정을 풀지 않으면 미래에 더 큰 비용을 치를 것”이라며 “확대 재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주장했다. 고통스럽더라도 경제 구조를 수술하고 기초 체력을 키우는 게 아니라 일단 돈으로 막고 보자는 안이한 접근이다.

안이하게 재정 중독에 빠지나

물론 경제가 어려우면 재정 지출을 늘리는 게 교과서적 해법이다. 하지만 재정 투입으로 시간을 벌면서 저성장과 양극화 문제는 구조조정을 통해 풀어가는 게 정석이다. 이창용 IMF 아태국장도 “중요한 것은 재정 지출의 용도다. 공공부문의 단기 일자리 창출은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잠재성장률을 높이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하려면 구조조정이 뒷받침돼야 하고, 그 과정에서 재정은 일자리가 아닌 근로자를 보호할 수 있는 사회안전망 확대에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지금 재정 지출의 내용을 보면 악성이다. 생산적인 투자지출이라면 경제성장으로 돌아오겠지만 기초연금·아동수당·노인 공공근로 등 선심성 현금을 퍼붓는 이전 지출이 크게 늘고 있다.

강남 집값도 아마추어 정책에 대한 시장의 역습이다. 그동안 김수현 전 정책실장과 김현미 국토부 장관이 무려 17차례 부동산 대책을 쏟아냈지만 모두 실패했다. 서울 아파트 가격은 30%나 폭등했다. 이번 분양가 상한제도 마찬가지다. 친문 핵심 의원들 지역구인 목동과 북아현동은 쏙 빠졌다. 김 장관 지역구(고양 정)와 친문 부산파의 거점인 부산은 아예 조정대상 지역에서 해제됐다. 이런 정치적 게리맨더링 때문에 부산·대전에는 관광버스를 타고 내려간 원정 쇼핑꾼들에 의해 미분양 아파트들이 동났다고 하고, 그제 강남 아파트 청약에는 461대 1의 로또 광풍이 불었다. 오죽하면 “문재인 정부는 풍선 놀이가 취미냐” “김현미 장관은 두더지 잡기를 좋아하나 봐”라는 비아냥이 넘쳐난다.

최근 들어 한국 경제의 중장기적 리스크가 불거지고 있다는 해외 언론들의 경고는 쉽게 흘려들을 일이 아니다. 그동안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떠받쳐온 두 기둥은 매년 1000억 달러에 이르던 경상수지 흑자와 국가 부채비율 30%대의 탄탄한 재정 건전성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내년 60조원 규모의 적자 국채 발행 등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 놓고 마구 신용카드를 그어댈 조짐이다. 여기에 반도체 침체와 경기 불황으로 세수마저 꺾였다. 이에 따라 홍남기 경제부총리도 “국가부채비율이 곧 40%를 돌파해 2022년에는 45% 선에 이를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지난해까지 680조원이던 국가 부채 역시 2023년엔 1000조원을 넘어서게 된다. 경상수지 흑자도 수출 급감에 따라 지난 1~9월 414억 달러로 내려앉았다. 이대로 가면 언제 시장의 복수로 국가신용등급이 강등될지 모를 살얼음판이다.

현 정부는 섣부른 경제 실험으로 성장과 분배를 다 놓쳐 버렸다. 총수요를 늘린다는 명분 아래 시장과 가격에 직접 개입했던 정책들이 기업에 비용 충격으로 작용하면서 공급 부문에 발작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자해 행위가 일자리 대란과 저성장, 양극화 심화라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이에 대해 경제학계는 시장 원칙에 맞게 정책 궤도를 수정하라며 “지금까지 경제가 나빠진 게 정책 실패 때문이란 점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어떤 제대로 된 정책도 나올 수 없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그제 문 대통령이 “계속 기존 정책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한국경제학회 등의 합리적 제안마저 무색해져 버렸다.

"경제 성공” 우기면 배신감 깊어져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최근 펴낸 『대변동-위기·선택·변화』에서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 12가지의 주요 요인을 꼽았다. 그 중 첫 번째가 위기를 있는 그대로 위기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 자신의 책임을 수용하고 좋은 본보기를 찾아야 하며, 정직한 자기 평가 등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현 정부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정부는 경제 위기를 부인하고 줄곧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며 그 시기를 2018년 말→올해 초→2019년 하반기로 계속 늦췄지만 빈말이 됐다. 하필이면 좋은 본보기도 성장률을 끌어올린 미국과 프랑스 등에서 찾아야지 왜 포퓰리즘으로 망한 차베스의 베네수엘라에 눈길을 주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국민의 체감 경기가 어려운데 정부만 자꾸 “경제가 성공하고 있다”고 우기면 좌절감과 배신감만 깊어질 뿐이다. 기어를 후진에 놓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을수록 차는 자꾸 뒤로 가게 된다. 잘못된 정책을 계속 고집하면 할수록 더 큰 시장의 복수를 부를 수밖에 없다. “한국 경제에 더 이상 먹을 게 없다”는 소리 만큼 무시무시하고 섬뜩한 경고는 없다. 그런 말이 떠도는 한 미래는 암울할 따름이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