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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히어로즈 좋아하는 줄 알아…짠하잖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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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지난달 17일 키움 히어로즈가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한 직후, 서울 고척돔을 찾은 팬들이 선수단을 향해 환호를 보내고 있다. [뉴스1]

지난달 17일 키움 히어로즈가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한 직후, 서울 고척돔을 찾은 팬들이 선수단을 향해 환호를 보내고 있다. [뉴스1]

“대체 왜 키움 히어로즈를 좋아해요?”

올드팬 5명 목소리를 들어보니 #주인 자주 바뀌어도 충성 남달라 #관련 사건·사고에 남은 선수 걱정 #기업의 구단 인수 놓고 찬반 팽팽

프로야구 히어로즈 팬이라는 말에 십중팔구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왜”라고 묻는다고 한다. 구단 재정은 열악해서 대형 자유계약선수(FA)도 잡지 못하고, 경영을 둘러싼 수뇌부 사정은 어수선하고, 소속 선수의 음주운전과 성폭행 혐의 논란 등 조용할 날이 없는 구단이 아닌가. 그래서 히어로즈 팬은 “왜”라는 질문을 받는다.

팬들 목소리를 들어봤다. 38년 차 ‘올드’ 팬부터 9년 차 ‘새내기’ 팬까지, 히어로즈 팬 5명을 수소문해 그들 목소리를 들어봤다. 2008년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해 재창단한 키움 히어로즈는 이제 12살이 됐다. 하지만 일부 팬들은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삼미슈퍼스타즈와 후신인 청보 핀토스(85~87), 태평양 돌핀스(88~95), 현대 유니콘스(96~2007)를 거쳐 히어로즈까지, 면면히 명맥을 이어온 팬들도 있다.

키움 히어로즈 올드팬

키움 히어로즈 올드팬

삼미 시절부터 팬이라는 김종대(60)씨는 “인천이 고향이다. 친구들은 현재 인천 연고 팀인 SK 와이번스를 좋아하지만, 나는 히어로즈를 응원한다”고 말했다. 김씨가 히어로즈를 응원하는 데는 선수를 향한 짠한 마음도 작용했다. 그는 “모기업이 가난해서 팀이 자주 팔렸다. 그나마 사정이 제일 나았던 현대가 구단을 매각할 때는 정말 슬펐다. 힘들게 이어온 팀이 진짜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암담하더라”라며 “히어로즈로 다시 창단됐다. 모기업이 없어 재정적으로 어렵지만, 선수들이 열심히 하는 모습에 계속 응원한다”고 설명했다. 아버지 김씨를 따라 히어로즈 팬이 된 아들 용태(32)씨는 “열악한 환경에도 꿋꿋이 야구에 전념하고 이겨내는 선수들 모습을 좋아한다”고 했다.

2011년 넥센 히어로즈 시절 팬이 된 김지숙(46)씨도 “(구단·선수 관련) 사건·사고가 터질 때마다 ‘남은 선수들이 힘들겠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열심히 해서 올해 준우승하지 않았나. 그런 선수들을 생각하면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5세 때 청보 팬으로 시작해 히어로즈 팬이 된 이기호(38)씨도 “팀 운영 주체가 바뀌고, 연고지도 인천에서 서울이 됐지만, 내가 좋아한 선수들이 남아 있어 응원 팀을 바꿀 수 없었다”며 “팀이 하도 다사다난해서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동요하지 않는다. 다만 선수들에게 악영향을 끼칠까 봐 항상 걱정”이라고 했다.

히어로즈 경영 논란의 중심에는 대주주인 이장석(53)씨가 있다. 이씨는 2008년 현대로부터 팀을 인수해 히어로즈 구단으로 명맥을 이었다. 네이밍권 판매와 선수 거래 등을 통해 팀을 운영해 KBO리그 구단 중 모기업 없는 유일한 구단이다. 이씨는 지난해 대법원에서 횡령 및 배임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 형이 확정돼 복역 중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영구 실격 조치를 했지만, ‘옥중 경영’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김용태씨는 “언젠가 홈 개막전 때 이장석 전 대표가 입장 관중과 악수하고 인사했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 이득을 취한 점은 비난받아 마땅하나, 야구에 대한 열정은 높았다”고 말했다. 93년 태평양 시절부터 팬이었다는 진인건(34)씨도 “없는 자원에 두 차례(2014, 19년) 팀을 한국시리즈에 올린 공은 인정하지만, 개인의 이익을 위해 횡령한 부분은 질책해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히어로즈 팬이 넉넉한 기업이 구단을 인수해주길 바란다. 김용태, 진인건씨는 “모기업이 생겨서 구단 수뇌부를 관리해주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반면, 모기업이 없는 현재 상황을 지지하는 팬도 있었다. 김종대씨는 “삼미부터 현대까지 모기업이 계속 바뀌는 것을 보며 구단에 모기업 있는 게 만능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이기호씨는 “모기업에서 야구를 모르는 사장, 단장이 내려오는 게 탐탁지 않다. 야구를 잘 아는 구단주가 운영하는 시스템이 좋다”고 말했다.

구단 내부 사정이 어수선한 가운데에도 히어로즈는 최근 2년 연속으로 가을야구를 했다. 특히 올해는 준우승까지 했다. 팬들은 역설적으로 “구단이 힘이 없고 가난해서 잘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지숙씨는 “돈이 없어서 외부에서 FA를 안 데려온다. 그래서 몸값 저렴한 젊은 선수를 써야 했는데, 이들이 현재 주축이 됐다. 다른 팀에서 온 대형 FA가 없어 위화감도 없고 팀 결속력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팬들 이야기는 선수 걱정으로 이어졌다. “히어로즈 구단주가 된다면”이라는 질문에 하나같이 “선수들 잘 먹이고, 잘 입혀서 야구에만 전념하게 해주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선수, 팀, 그리고 야구까지. 결국 이 모두를 사랑하는 팬이 있기에 그들이 있다.

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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