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박정호 논설위원이 간다

80년대 ‘애마부인’ 열풍 뒤에 숨은 사회영화 가위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검열로 새롭게 돌아본 한국영화 100년

한국영화 100년 검열의 역사 특별전을 둘러보고 있는 영화사학자 김종원, 영화감독 이장호, 한국영화박물관 조소연 큐레이터.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 100년 검열의 역사 특별전을 둘러보고 있는 영화사학자 김종원, 영화감독 이장호, 한국영화박물관 조소연 큐레이터.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 사회에서 따돌림만 당해온 어릿광대의 쓴웃음이다. 누적 관객 500만 명을 넘어선 영화 ‘조커’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실종된 가상 도시 고담에서 빚어진 한 악인의 핏빛 탄생기가 섬뜩하다. ‘조커’의 등급을 놓고 논란도 일었다. 미국에선 R등급(17세 이하는 성인이 동반해야 관람 가능) 판정을 받은 반면 한국에선 ‘15세 이상 관람가’가 나와 “한국이 미국보다 등급에 관대한 것 아니냐”는 시각과 “한국과 미국의 잣대가 다르다. 두 나라의 문화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섰다.

‘난쏘공’ 시나리오 8차례나 개작 #50년대에는 키스 장면도 잘라내 #검열과 맞서며 성장해온 충무로 #‘제한상영가’ 등급 지금도 논란 중

영화 등급은 개별 국가에서 인정되는 표현의 수위를 대변한다. 영화 검열이 사라진 시대의 가이드북 역할을 한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 비해 등급 판정이 자유로워진 건 사실이지만 전용상영관 하나 없는 ‘제한상영가’ 등급이 남아 있는 만큼 검열이 100% 없어진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최대 문화상품인 영화는 파급력이 막강하다. 시대·장소에 따라 이를 통제하려는 움직임도 끊이지 않았다. 기존 가치에 도전하는 스크린과 사회 안정을 앞세우는 지도층의 충돌이다. 올 한국영화 100년을 맞아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리고 있는 ‘금지된 상상, 억압의 상처’ 특별전(내년 3월 22일까지)을 찾았다. 조소연 큐레이터는 “검열이라는 키워드로 충무로 100년을 짚어본 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전시장에서 눈에 띄는 건 밀실처럼 꾸민 작은 방이다. ‘빼앗긴 필름’ 코너다. 차르르르~~, 옛날 영사기가 돌아가고, 방 가운데 스크린에 필름 조각들이 잇따라 비친다. 성인 넷이 앉는 책상이 보이고, 책상 위에는 시나리오 대본이 놓여 있다. 1970년대 문화공보부가 운영한 검열실 풍경이다. 당시 영화를 개봉하려면 문공부 직원 두 명, 중앙정보부와 치안본부 직원 각각 한 명, 총 네 명의 검열관을 통과해야 했다. 검열관이 삭제할 대목을 대본에 기록하면, 영사기사가 해당 부분 필름을 잘라냈다. 이른바 ‘가위질’ 현장이다.

1970년대 문화공보부 검열실을 재현한 모습. 박정호 기자

1970년대 문화공보부 검열실을 재현한 모습. 박정호 기자

현재 영상자료원에는 삭제된 필름이 960여 편 소장돼 있다. 이번에 24편의 잘려나간 부분을 디지털 복원해 일반에 처음 공개했다. ‘자유부인’(한형모 감독·1956) ‘오발탄’(유현목·1961) ‘별들의 고향’ (이장호·1974)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원세·1981) ‘고래사냥’(배창호·1984) ‘서편제’(임권택·1993) 등이다. 일례로 소설가 조세희 원작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여덟 번이나 시나리오를 다시 써야 했다. 도시 빈민의 애환을 서해안 염전 사람들 얘기로 바꿨음에도 서민들에게 좌절감을 주고 계층 간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원세 감독은 “영화가 가시만 남은 생선처럼 됐다. 체제에 불만을 품은 부분은 여지없이 다 붉은 줄이 그어졌다. 그분들(검열관) 참 명석하다. 감독이 하고자 하는 얘기를 어떻게 그렇게 잘 찾아내는지…”라고 기억했다.

80년대 시골서 상경한 청년 셋을 다룬 블랙 코미디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일화도 새롭다. 이장호 감독은 “전두환 정부 초창기 젊은 예술가들이 모두 검열위원에서 빠져나가고 소설가 박완서씨가 유일하게 남아 ‘이 영화에 손을 대지 못한다’고 주장해 개봉할 수 있었다”며 “영화 속 해병대 노래에 등장하는 ‘순자’가 대통령 부인 이름과 같아 ‘ㅅ’자만 잘라내 ‘운자’라고 수정했다”고 말했다. 전시에는 각종 검열 서류, 관계자들 증언록 등이 함께 나왔다.

영화 검열은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다. 1919년 한국 최초의 영화 ‘의리적 구토’ 이후 일제는 공안·풍속상의 지장이 없다고 인정할 때만 상영을 허가했다. 나운규의 ‘사랑을 찾아서’(1928)의 원제는 ‘두만강을 건너서’였지만 두만강이 일본을 부정하는 망명객을 상징한다는 이유로 제목을 바꿔야 했다. ‘나는 죽더라도 조선에 묻어 달라’는 대사도 심의에 걸려 두 권 분량 필름이 잘려나갔다. 미군정기·한국전쟁 중에도 검열은 계속됐다. 50년대에는 주로 음란·퇴폐성이 도마에 올랐다. 정비석 원작의 ‘자유부인’에서 남녀가 춤을 추다 키스하는 장면도 살아남지 못했다. 4·19 이후부터 5·16까지 짧은 기간만이 한국 영화사에서 유일하게 검열이 없던 때였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한국영화 황금기인 60년대도 검열을 피해 가지 못했다. 사전 시나리오, 제작 후 필름 검열이란 이중 통제를 받았다. 61년 장면 내각 때 개봉했다가 군사정부에 의해 상영이 중단된 ‘오발탄’이 대표적 피해 사례로 꼽힌다. 한국전쟁의 충격으로 실성한 노인이 부르짖는 ‘가자~’가 ‘북한으로 가자’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고, 해방촌·청계천의 빈민층 묘사, 은행 앞 노상방뇨 장면 등이 혁명 공약에 위배된다는 판정을 받았다.

이만희 감독은 64년 ‘7인의 여포로’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최초의 감독이란 기록을 세웠다. 북한군에 사로잡힌 간호부대 소속 여군과 민간인 포로 7명을 다룬 영화였는데, 당시 검찰은 국군을 무기력하게 묘사하고 북한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혐의로 기소했다. 이 감독을 옹호한 유현목 감독도 입건됐다. 남북분단의 또 다른 희비극이다.

70년대 유신 정부 때 검열이 강화되면서 충무로의 활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80년대에는 사회비판적 영화에 대한 통제가 거세졌다. ‘별들의 고향’ ‘영자의 전성시대’ 등 70년대 잇따른 호스티스 영화, ‘애마부인’ 연작으로 정점을 찍은 80년대 에로영화는 이런 갑갑한 시대를 증언하는 쌍생아와 같다. 입과 귀가 닫힌 사람들의 불만을 화장기 짙은 영화로 누그러뜨리려는 집권층도 계산도 작용했다. 85년 제작된 한국영화 88편 가운데 55편이 에로영화였다.

87년 6·29 민주화 선언 이후 스크린에도 훈풍이 불어왔다. 87년 시나리오 사전심의가 철폐됐고, 96년 영화 사전심의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났다. 이어 97년 개정 영화진흥법에 따라 영화심의를 대신하는 영화등급제가 도입됐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만큼 그에 따른 책임과 제도 보완이 요청되는 요즘이다. 조소연 큐레이터는 “제한상영가 등급을 둘러싼 실효성 논란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했다.

이번 기획은 아쉬움도 남긴다. 100년이란 시간을 담아내기에 전시장이 비좁다. 130㎡(약 40평) 공간에 수많은 콘텐트를 넣다 보니 찬찬히 둘러보는 데 한계가 있다. 동전의 앞뒤 같은 창작과 검열의 긴장 관계를 살펴보는 재미는 쏠쏠하지만 말이다. “영화예술이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곧 대중의 소리를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대중의 소리를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영화예술의 임종을 의미한다”는 유현목 감독의 50년 전 외침은 지금도 유효하지 않을까. 영화를 넘어 문화, 나아가 사회 전체에 대한 호소다.

자체 등급제로 정부 검열 풀어간 할리우드

‘꿈의 공장’ 할리우드도 당국의 검열에 대응하며 발전해왔다. 19세기 말 등장한 영화는 대중이 값싸게 누릴 수 있는 대표적 오락거리였다. 1905년 선보인 상설극장 ‘니켈로디언’이 불을 댕겼다. 5센트 정도 내면 신기한 활동사진을 즐길 수 있었다. 정부·종교·언론 등에서 들고 일어섰다. 스캔들·범죄·폭력을 조장한다고 비판했다. 1907년 시카고 시의회가 미국 최초의 영화 검열 조례를 통과시켰다.

검열 바람은 1913년 ‘뮤추얼 판결’에서 절정을 이뤘다. 오하이오주 대법원은 영화 검열이 미국 수정헌법 1조에 명시된 언론·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영화를 이윤 취득을 위한 사업으로 간주했다. 영화인들은 제작자·배급자협회 등을 구성하며 대응에 나섰다. 자체 제작규범을 만들고, 이를 어길 경우 거액의 벌금을 부과했다.

할리우드의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51년 ‘미라클 사건’이 분수령을 이뤘다. 연방법원은 영화도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에 포함된다고 선언했다. 작품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막았다. 영화제작자들은 68년 자발적인 등급제로 화답했다. 이후 수차례 규정을 손질하며 연령에 따른 극장 출입을 제한했다. 자율규제로 검열을 피하며 영화업계의 파워를 확대했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