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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혁주의 시선

스러졌던 자율주행차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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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권혁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7, 8평쯤이나 될까. 작은 상점으로 쓰였을 법한 공간은 컴퓨터와 모니터 몇 대, 그리고 각종 전자부품으로 가득 찼다. 납땜인두까지 놓여 있는 것이 얼핏 전파상을 연상케 했다. 경기 용인시 풍덕천동의 어느 사무실 풍경이다. 한민홍(77) 전 고려대 산업공학과 교수가 은퇴한 뒤 개인 연구를 하는 곳이다.

1995년 국산 무인차 경부선 주행 #지원 끊겨 무너진 ‘세계 최고’ 꿈 #육성 나선 정부가 피울 수 있을까

한 교수는 국내 자율주행차 분야 선구자다. 그를 떠올린 건 얼마 전 신문을 보면서였다. 기사 제목은 ‘8년 뒤 경부고속도로 세계 첫 전면 자율주행’. 정부가 ‘미래차산업 국가 비전 선포식’에서 선언한 내용이었다. 읽는 순간 1995년과 지난해 두 차례 한 교수를 만났던 기억이 소환됐다.

그는 26년 전인 93년 이미 자율차를 만들어 서울 도심 주행에 성공했다. 지난해 여름 중앙일보를 통해 소개된 이야기다<8월 27일자 24면>.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 2년 뒤인 95년 한민홍 교수는 KBS 9시뉴스에 등장했다. ‘시속 100㎞ 무인차’라는 내용이었다. 옛 아시아자동차의 ‘록스타’를 개조한 자율주행차가 경부고속도로에서 특정 차선을 따라 계속 달리는 모습이 나갔다. 한 교수는 운전대와 페달에서 손·발을 뗀 것은 물론, 운전석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팔베개를 한 채 옆으로 눕기까지 했다. 동승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운전하다 피곤하면 누워서 자도 되는, 꿈의 자동차가 출현할 날이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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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았다”던 예언은 빗나갔다.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다. 한 교수는 원래 미국 텍사스주립대 교수로 재직하며 무인 잠수정을 연구했다. 미국 국방부 산하 고등방위연구계획국(DARPA)의 프로젝트였다. 80년대 후반 국내에 들어와 무인 자동차 연구로 방향을 바꿨다. 93년 첫 서울 시내 자율주행에 성공했다. 지금은 철거된 청계고가에서 출발해 한남대교를 거쳐 여의도 63빌딩까지 약 17㎞를 달렸다. 이어 경부고속도로까지 누볐다. 성과를 국제 학계에 발표하자 세계 최고 자동차 업체였던 독일 벤츠와 폴크스바겐에서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연구개발을 이어가기 위해 정부에 프로젝트를 제안했다가 탈락했다. 거부된 이유를 기억하느냐고 한 교수에게 물었다. “난들 알겠소. 심사한 사람들이 알겠지.” 그 뒤엔 월급을 쪼개 자율차 연구를 조금씩 계속했다. 연구비 지원받는 다른 프로젝트를 하면서였다. 이래서야 추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국내 자율차 개발은 그렇게 ‘잃어버린 20년’으로 접어들었다.

국내 연구가 본격적으로 재시동을 건 것은 2010년대 중반에 가서였다. 구글의 무인자동차 시연에 자극받았다. 하지만 이젠 뒤처져 부지런히 쫓아가야 하는 신세다. 올 상반기 글로벌 조사 업체가 발표한 자율차 기술 순위에서 국내 회사는 10위 안에 아무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현대차는 15위였다. 올가을 들어서야 현대차가 앱티브·벨로다인 같은 외국 톱 클래스 업체들과 제휴하며 격차를 따라잡을 기반을 마련했다.

한 교수는 10여 년 전 정년퇴직한 뒤에도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자율차용 소프트웨어와 제어기기를 업그레이드해서 시험 주행을 한다. 자율차와는 별도로 ‘운전 중 졸음 방지 안경’도 개발했다. 눈꺼풀이 약간 긴 시간 동안 감겨 있다든지, 고개가 정상 각도보다 많이 떨궈진다든지 하면 알아채 경고음을 내는 안경이다. 나이 여든을 눈앞에 둔 지금도 식지 않는 연구열이다.

만일 한 교수가 한창때 연구비 지원을 계속 받았다면 어땠을까. 201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일본의 나카무라 슈지(中村修二)는 애초 중소 화학업체에서 일했다. 사장의 묵묵한 지원 아래 90년대 초반 효율 높은 청색 LED를 발명해 결국 노벨상을 수상했다. (나중에 보상을 쥐꼬리만큼 주는 바람에 나카무라가 회사를 박차고 나가기는 했다.) 90년대 일본 중기는 그렇게 끈기 있게 연구를 지원해 LED의 불을 밝혔고, 한국 정부는 자율차 개발 엔진의 시동을 꺼 버렸다.

한국은 이제 다시 미래 자율차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정부는 미래차 부품·소재·장비에 2조2000억원을 쏟아붓겠다고 했다. 그러자 벌써 정반대 걱정이 나온다. 근거는 1, 2년 전 나돌았던 소문이다. “자율차 전문 제작 업체가 있다. 몇몇 연구소는 여기서 만든 자율차를 받아다가 운행 시연을 하고는 자신들 연구 성과로 포장한다”라는 것이었다. 복수의 교수들은 “소문이 아니라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증언했다. 과거엔 보석을 몰라봐서 문제, 이젠 의심 가는 연구에 나랏돈이 뿌려질까 봐 걱정이다. 하여튼 세금 새는 소리는 들리지 않게 하고 볼 노릇이다.

권혁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