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전두환 몰락 앞당긴 "성모욕행위"···역대 정권 언론 수난史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사자명예훼손혐의를 받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법원을 나오고 있다. [중앙포토]

사자명예훼손혐의를 받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법원을 나오고 있다. [중앙포토]

법무부가 사실과 다른 ‘오보(誤報)’로 사건관계자나 검사의 명예를 훼손한 언론사에 대해 검찰청 출입을 제한하는 규정을 신설한 것을 두고 언론 자유와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하는 조치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엄혹했던 전두환 정권 시절 내려진 '보도지침'과 노무현 정권 당시 기자실 통·폐합 조처 등 역대 정권마다 반복되는 언론 수난사(史)를 되짚어봤다.

전두환 정권 “‘성추행’말고 ‘성모욕행위’라 해라”

“기사를 사회면에 싣되, 기자들의 독자적인 취재 내용은 싣지 말고, 검찰 발표 내용만 보도하며, 사건 명칭을 ‘성추행’이라 하지 말고 ‘성모욕행위’로 표현하라”

부천서 권인숙씨 성고문 사건 발생 1년11개월만에 첫 공판을 받기위해 법정에 호송되는 문귀동피고인. 문 피고인은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했다. [중앙포토]

부천서 권인숙씨 성고문 사건 발생 1년11개월만에 첫 공판을 받기위해 법정에 호송되는 문귀동피고인. 문 피고인은 공소사실을 모두 부인했다. [중앙포토]

1986년 7월 공안당국은 이른바 ‘부천서 성고문’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부천경찰서의 경장이던 문귀동이 이른바 공장에 ‘위장취업’한 서울대 의류학과 권인숙씨를 성적으로 추행한 사건이다. 그러나 당시 수사당국은 피해자인 권인숙씨를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까지 이용했다”고 매도했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기가 차다 못해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인데도, 언론은 이를 받아썼다.

이 당시 신군부 전두환 정권이 언론에 내린 것이 ‘보도지침’이였다. 정권이 사안의 보도 여부는 물론 방향과 논조, 기사의 분량과 게재 지면, 표현까지 개입한 것이다. 예컨대 필리핀의 민주화운동에 관한 기사는 가급적 작게 보도할 것, 전기 요금 인상을 보도할 때는 제목에 몇 퍼센트 올랐다고 하지 말고, 10원에서 20원으로 올랐다고 보도할 것 등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는 노릇. 언론사 내에서만 알고 쉬쉬하던 보도지침은 1986년 ‘말’지의 폭로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진다. 언론인 김태홍·신홍범·김주언씨는 “우리가 공기 없이 살 수 없듯이 언론의 자유, 학문의 자유 없이 민주주의는 살아갈 수 없다”고 맞섰다.

권인숙 법무부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장. 권 위원장은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다. 김상선 기자

권인숙 법무부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장. 권 위원장은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다. 김상선 기자

‘부천경찰서 성 고문 사건’은 결과적으로 전두환 정권의 몰락을 앞당긴 사건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운동권 내에서도 도외시 됐던 여성인권 문제를 논의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사건의 피해자였던 권인숙씨는 양성평등과 인권 등을 다룬 저서를 출간하며 한국 사회의 성폭력 문제에 대한 연구자로 활동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는 법무부 성희롱·성범죄 대책 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됐다.

한 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하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반란수괴죄 등으로 구속 기소돼 1심 사형, 2심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가 사면됐다. 지금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고(故)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 중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기자실 대못질해 넘기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5월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기자실 통‧폐합을 추진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후 대학 강연에서 “다음 정권으로 넘어가면 기자실이 되살아날 것 같아 제가 확실하게 대못질을 해 넘겨주려고 한다”고 강한 의지를 밝혔다. 그는 국무회의에선 “기자실은 기자들이 죽치고 앉아 담합하는 곳”이라고 평했다.

언론은 일제히 반발했다. 정부가 권력의 힘으로 언론을 통제해야 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잘못된 언론관에서 출발한 비민주적 조치라는 취지에서다.

언론인 출신 국회의원 기자실 통폐합 반대 기자회견 [뉴시스]

언론인 출신 국회의원 기자실 통폐합 반대 기자회견 [뉴시스]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의 비판도 이어졌다. 당시 열린우리당의 박영선 의원(현재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이낙연 민주당 의원(현 국무총리) 등 언론인 출신 국회의원들은 “언론의 정보 접근권과 국민의 알권리를 심하게 훼손할 수 있어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기자실 통폐합은 재정이 풍부한 언론사만 존립시키고 나머지 언론사의 취재력을 상당 정도 약화시킬 수 있으며, 기자들이 상주하는 사무실을 독자적으로 구할 수 없는 언론사들의 취재 환경을 크게 악화시킬 것”이라며 “이들이 거리의 기자로, 커피숍의 기자로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 결과를 낳아 결국 언론의 다양성을 훼손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박원순 “보호받을 자격 있는 언론만 자유”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 등이 언론에 대한 규제를 주장한 뒤 잇따라 법무부 조치가 발표되면서 임기 후반에 들어선 정부가 ‘언론 옥죄기’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박원순 서울시장(왼쪽)과 방송인 김어준씨(오른쪽) [중앙포토, 연합뉴스]

박원순 서울시장(왼쪽)과 방송인 김어준씨(오른쪽) [중앙포토, 연합뉴스]

박 서울시장은 지난달 25일 팟캐스트·유튜브 방송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출연해 “언론의 자유는 보호받을 자격이 있는 언론에만 해당한다”며 “언론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학계에서는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일뿐더러, 장기적 시각에서 권력을 권력답게 유지하게 하는 힘이라 짚었다. 신율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는 “권력의 언론 통제는 그 힘이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에서 비롯된다”며 “특히 현 정권은 스스로 ‘선하다’고 여기는데서 이러한 현상이 연유하는 것”이라 분석했다.

이어 신 교수는 “선한 권력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고, 권력을 선하게 만드는 존재가 견제하는 언론”이라며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불거진 블랙리스트 사건 등에서 볼 수 있듯 비판받지 않으려 하는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지적했다.

김수민 기자 kim.sumin2@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