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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총리 법정에 세운 가상소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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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9호 21면

일본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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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성 지음
아작

SF 작가 문윤성의 『일본심판』 #“반성하지 않는 일본 응징이 답”

한국 과학소설(SF)의 선구자로 꼽히는 문윤성(1916~2000)의 장편소설이다. 제목도 그렇지만, 보다 구체적인 ‘일본총리 납치사건’이라는 부제에 끌려 읽기 시작했다. 파격적인 내용, 속도감 있는 사건 전개에 마음을 빼앗겨 부지런히 책장을 넘기게 된다. 쉽게 말해 대중소설이다. 그렇다고 소설의 마지막 장까지 시종일관 짜릿하지는 않다. 사람마다 또 독서 환경에 따라 다를 텐데, 전체 16개 장(章) 가운데 대략 4, 5장까지가 독자의 산만함을 용서치 않는 구간이지 싶다. 소설의 화자인 ‘나’(김기식)를 포함한 36명의 다국적(주로 한국인) 세계평화유지기구(WPO) 회원들이 일본 총리 등 13명의 각료를 납치해 국제법정에 세우는, 요즘 반일감정을 속 시원히 풀어주는 서사가 몰아친다.

작품성 같은 고고한 잣대를 들이댄다면 결코 뛰어나다고 하기 어려워도, 좀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는 요즘 한·일 갈등과 겹쳐 흥미를 자아내는 작품이다. 1987년 출간됐으나 잊혀졌던 작품을 출판사가 발 빠르게 다시 꺼낸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소설가 문윤성(1916~2000). 국내 첫 장편 SF를 쓴 1세대 작가로 꼽힌다. [사진 아작]

소설가 문윤성(1916~2000). 국내 첫 장편 SF를 쓴 1세대 작가로 꼽힌다. [사진 아작]

소설은 출간되던 해, 1987년이 시간 배경이다. 책날개 정보에 따르면 문윤성은 85년 나카소네 당시 일본 총리의 한·일 수교 20주년 기념 회견을 보고 분노가 일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심한 듯 당대의 한·일 갈등, 물고 물리는 동북아 정세, 가파른 국제 통상마찰 등을 소설 배경으로 펼쳐 놓는다.

그런데 소설에서 그리는 80년대 중반, 그러니까 30년 전 신문지면을 지금 다시 꺼내보면 놀라울 정도로 요즘과 닮아 있다. 21세기 중국의 역할을 당시 일본이 했겠거니 하는 점이 다르다면 다르다. 미국의 상·하 양원은 “일본은 미국만큼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며 보복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일본 문부상은 일본의 과거사를 비난하는 주변국들을 향해 당신들은 과거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느냐는 역사 망언을 해 사퇴를 자초한다. 이런 기사들이 보인다. 역사에 진보란 없고, 반복일 뿐인가.

소설 속의 김기식 등은 당대의 일본이, 최근 일본과 마찬가지로, 경제전쟁을 먼저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과거 16세기에는 화승총, 19세기 들어 군함과 대포로 이웃국들을 침략했다면 20세기에는 경제를 무기로 삼는다는 진단이다. 경제수탈이 한국은 물론 세계의 평화를 깨뜨리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거다. 그런데도 일본은 반성할 줄 모른다. 여전히 한국인을 차별하고 원폭 피해자들의 아픔에 나 몰라라 한다. 문윤성은 김기식 등을 내세워 일본 각료들에게 요구사항들을 내건다. 무역 불균형으로 인한 주변국 피해를 보상하고 제국주의 침략 사죄단을 파견하며 각종 공해산업이 배출한 산업 폐기물을 되가져가라고 압박한다. 일본인을 증오하거나 살상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분명히 선을 긋지만,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무력 공격을 감행하겠다는 일종의 최후통첩이다.

물론 소설 속 김기식의 의거, 일본 입장에서는 무력 도발이 파국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30년 전 소설의 갈등 해결방식에서 현재의 난국을 타개하는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문윤성은 생전 주목받는 작가는 아니었다. 『일본심판』은 국내 첫 장편 SF로 평가받는 그의 1967년 대표작 『완전사회』 이후 20여년 만의 장편소설이다. 사라졌던 그의 소설이 다시 살아나 잊고 있었던 옛 풍경을 일깨운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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