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때보다 더 길다···0%대 저물가에도 귀닫은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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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대형마트 채소 판매 매장. [뉴스1]

서울의 한 대형마트 채소 판매 매장. [뉴스1]

지난달까지 10개월 연속 0%대 저물가 상황이 이어지고 있지만, 정부는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경제학계는 물론 국책연구소에서도 국내·외 소비가 줄어든 '총수요 감소'를 원인으로 지목한다. 그러나 정부는 국제 유가나 농·축·수산물 가격 등 공급 측 요인으로만 시야를 좁히다 보니 수요 진작 대책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형국이다.

뉴스분석

외환위기 때보다 긴 저물가…농산물값 올라도 제자리

통계청이 1일 발표한 ‘10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물가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0%를 기록했다. 물가는 올해 1~7월 줄곧 0%대를 기록하다 지난 8월 -0.04%로 사상 첫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9월에는 -0.4%로 하락 폭이 커졌다. 10개월 연속 0%대를 기록한 것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2~9월 8개월 연속 0%대를 기록한 것보다 길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문제는 정부가 그간 물가 하락 요인으로 꼽았던 농·축·수산물 가격이 10월에는 하락 폭을 크게 좁혔는데도 물가상승률이 0%에 머문다는 점이다. 10월 농·축·수산물 가격은 3.8% 하락하며 전월(-8.2%)보다 덜 내렸다. 특히 배추·열무 가격은 1년 전보다 각각 66%, 89% 오르는 등 채소류 가격 하락 폭이 1.6%로 크게 줄었다. 지난 9월 농산물이 13.8% 떨어지며 전체 물가를 끌어내린 상황과는 사뭇 달랐다.

내수 경기 '체온계' 역할을 하는 근원물가지수도 0.8% 오르는 데 그쳤다. 근원물가는 계절적 요인에 따라 물가가 들쭉날쭉해 질 수 있는 농산물ㆍ석유류 등을 제외한 물가다. 근원물가는 7월을 제외하고 올해 3월부터 계속 0%대를 기록, 한국은행의 적정 물가 관리 수준(2%)에 장기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 상황이 사실상의 디플레이션(경기 침체를 동반한 물가 하락) 초입이라는 분석이 제기돼 온 것이다. 물가가 계속 떨어질 것이라 예상하는 디플레이션 국면에선 생산은 물론 소비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정부, “유가 급등 기저효과…연말 반등할 것” 

이두원 통계청 물가동향과장이 1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에서 10월 소비자물가동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두원 통계청 물가동향과장이 1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에서 10월 소비자물가동향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는 이 같은 저물가의 원인을 공급 측 요인에서 찾고 있다. 김동곤 기획재정부 물가정책과장은 “지난해 유가가 급등한 데 따른 기저효과가 지속하는 등 공급 요인과 하반기 시행된 고3 무상교육, 무상급식 등 정책 요인이 영향을 미쳤다”며 “연말에는 0%대 중반으로 반등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총수요 감소 탓”…디플레이션 우려 안걷혔다 

전문가들의 평가는 이와 다르다. 9월 '마이너스 물가'의 원인이 된 농산물 가격이 올랐는데도 여전히 물가가 오르지 않는 것은 민간 소비 부진에 따른 총수요 위축으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9월 민간 소비는 1년 9개월 만에 최대 폭(-2.2%)으로 줄었다. 슈퍼마켓·대형마트·백화점 등에서 대다수 유통 현장에서 소비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분석은 국책연구소에서도 나왔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달 28일 보고서에서 "(저물가는) 정부의 복지 정책이나 특정 품목이 주도했다기보다 다수 품목에서 물가가 낮아지며 나타난 현상”이라며 "일시적 공급 요인뿐 아니라 수요 측 요인도 주요하게 작용했다"고 진단했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시적인 반등보다 0%대 물가가 장기화하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며 “올해 경제성장률이 1%대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는 등 경기가 부진한 것이 저물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내수 진작을 위해 최저임금 인상, 근무시간 단축을 시행했는데도 물가가 부진한 것은 소비가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며 “인건비 상승으로 기업이 고용을 줄이면 소비 부진을 가속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세종=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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