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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후남의 영화몽상

‘82년생 김지영’의 공감 능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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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후남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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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하면 남의 인생에 참견하고 싶지 않지만, 가끔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한마디 해주고픈 상대가 있다. 가장 최근에는 ‘김지영씨’다. 3년 전 소설로 처음 나와 이제 영화가 된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이다.

아기 엄마로, 며느리로, 아내로 그가 영화 초반 조용히 치르는 익숙한 분투를 보고 있노라니 고구마를 먹은 듯 갑갑했다. 스트레스를 수다로라도 풀면 좋으련만, 그는 남 앞에 목청 높이는 데도, 더구나 싫은 소리를 하는 데는 영 재주가 없다. ‘저러다 병난다’는 말이 입 밖에 나올뻔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김지영과 그 어머니(오른쪽), 어머니의 어머니 얘기를 함께 녹여낸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김지영과 그 어머니(오른쪽), 어머니의 어머니 얘기를 함께 녹여낸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아니나 다를까. 소설처럼 지영씨는 영화에서도 병을 앓는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듯 말하는 빙의 증상이 심각하다. 종종 82년생이 아니라 한 세대 위인 자신의 어머니처럼, 또 어머니의 어머니처럼 그 삶의 회한과 바람을 절절히 들려준다.

지켜보는 가족에겐 무척 걱정스러운 일이지만, 덕분에 지영씨와 그의 얘기가 지닌 강점이 도드라진다. 빙의라는 소설적·영화적 장치는 여성의 삶에 대한 누적된 기억을 불러낸다. 병을 논외로 한다면, 지영씨는 기특하게도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100만부 넘게 팔려 하나의 상징이 됐다. 반작용으로 그 제목만 봐도 악플을 다는 이들도 있다. 페미니즘 여전사와 거리가 있는 지영씨의 기질로 보면 놀라운 일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산문집 『말하다』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실 우리가 낯선 것을 가장 안전하게 만나는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에게 서재는 “오래된 목소리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영혼에 접속하는, 일상에서 쉽게 만나기 힘든 타자를 대면하는 공간”이 된다. 82년생 김지영씨를 영화관에서 만나는 일도 그렇다. 지극히 안전하게, 공감을 자극받는 기회다.

이후남 문화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