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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녀를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면? 돈 카를로의 비극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형철의 운동화 신고 오페라 산책(3)

가슴 시린 첫사랑과 여태껏 미련으로 남은 마지막 사랑, 여러분에게 사랑은 어떻게 가슴에 남아있나요? 우리가 영화나 소설에서 만난 비극적인 사랑은 어떤 모습이었던가요?

베르디가 1867년 초연한 오페라 '돈 카를로'는 독일의 작가 프리드리히 쉴러의 원작을 바탕으로 사랑하는 약혼녀가 아버지와의 정략결혼으로 새어머니가 되는, 비극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는 독일의 작가 프리드리히 쉴러의 원작을 바탕으로 사랑하는 약혼녀가 아버지와의 정략 결혼으로 새 어머니가 되는 비극적인 사랑을 노래합니다. [사진 용인문화재단]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는 독일의 작가 프리드리히 쉴러의 원작을 바탕으로 사랑하는 약혼녀가 아버지와의 정략 결혼으로 새 어머니가 되는 비극적인 사랑을 노래합니다. [사진 용인문화재단]

16세기 스페인의 왕 필리포 2세와 그의 아들인 돈 카를로 왕자를 둘러싼 실화에 기인한 이 작품은 사랑의 첫 단추가 어긋난 상황에서 벌어지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답니다.

스페인 제국의 전성기를 닦은 전제군주답게 필리포 2세는 결혼도 정략적으로 했습니다. 총 네 번의 결혼 중 첫 번째는 포르투갈을 얻기 위해 돈 카를로의 어머니 이사벨과 두 번째는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를 얻기 위해 메리 여왕(유명한 Bloody Mary)과 결혼한 뒤, 이제 프랑스와의 평화조약을 위해 앙리 2세의 딸 엘리자베타 공주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허나 엘리자베타 공주가 이미 돈 카를로를 사랑하고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이였기에 비극의 싹이 움트고 있었던 것이지요. 돈 카를로는 자신이 밤하늘의 별처럼 사랑하고 기다리던 연인이 갑자기 어미가 된 이 기막힌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답니다.

돈 카를로의 성급한 실수로 왕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될 이런 상황을 공녀인 에볼리에 털어놓아 위험에 빠지지만, 이 환장할 것 같은 그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은 오랜 친구인 로드리고뿐입니다.

팽팽한 줄을 당기다가 놓기를 반복하는 듯한 전주곡 뒤에 막이 오르면, 강화조약을 위한 사절단으로 프랑스에 온 돈 카를로가 파리 남부 교외의 퐁텐블로 숲에서 약혼녀 엘리자베타를 만납니다. 밀레로 대표되는 자연주의 화가들인 바르비종파가 활동한 그 퐁텐블로 숲에서요. 두 사람은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고, 돈 카를로는 그녀만을 사랑하며 그녀를 위해 살고 또 죽기를 서원합니다.

허나 이들에게 허락된 사랑은 이때뿐이랍니다. 이 오페라에서 두 사람의 행복한 사랑의 노래는 더는 불리지 않지요.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아뿔싸! 결혼 상대가 왕자가 아니라 스페인 왕이라고 발표됩니다. 두 사람은 절망하고, 돈 카를로는 잔인한 운명을 저주합니다.

돈 카를로는 엘리자베타의 결혼 이후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 중입니다. 그의 친구 로드리고 후작이 플랑드르 지방을 순시하고 돌아오자, 그에게 왕비를 사랑하는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친구는 말없이 친구의 아픔을 위로해줍니다. 그는 플랑드르에서 돌아오는 길에 받아온 프랑스 왕비의 편지를 엘리자베타에게 전달하면서, 은밀히 만나고자 하는 돈 카를로의 편지도 전해주지요.

국왕의 처절한 아리아는 어린 공주를 취한 왕에게는 숙명이기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은교'에서 제자에게 은교를 빼앗기고 분노의 복수를 꿈꾸는 이적요가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사진 HMN 4K미디어]

국왕의 처절한 아리아는 어린 공주를 취한 왕에게는 숙명이기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은교'에서 제자에게 은교를 빼앗기고 분노의 복수를 꿈꾸는 이적요가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사진 HMN 4K미디어]

드디어 정원에서 돈 카를로는 새어머니가 된 공주를 마주합니다. 자신을 ‘아들아!’라고 대하는 그녀를 보면서 마음은 찢어지지만, 그는 스스로 감정을 자제합니다. 허나 그것이 어디 마음대로 잘 되던가요? 결국 마음속 깊은 곳의 열정이 폭발하여 왕비를 껴안으려 하지요. 그에 대한 호칭이 ‘왕자님’에서 ‘카를로’로 바뀌는 엘리자베타도 심정이 요동치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숨조차 쉬기 힘들답니다. 허나, 그녀에게는 지켜야 할 신과 순결함이 있기에 왕자를 준엄하게 꾸짖게 되고, “나는 저주받았다”고 오열하며 뛰쳐나가는 돈 카를로를 보며 그녀도 절규합니다.

궁의 정원에는 공녀인 에볼리가 사라센 왕의 전설을 노래하는 아리아 ‘아름다운 정원에서’를 부르고 있습니다. 베일에 싸인 아름다운 여인에게 왕이 사랑을 고백했는데 베일을 벗겨보니 왕비였다는 내용의 매력 있는 아리아랍니다. 그녀는 돈 카를로가 사랑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 때문에 상사병이 난 것으로 오해합니다.

에볼리는 돈 카를로에게 정원에서 만나자는 메모를 써 보냅니다. 메모를 받은 왕자는 자신의 사랑을 되찾은 것으로 믿고 달려가, 베일을 쓴 채 자신을 기다리는 여인에게 경솔하게 사랑 고백을 하게 됩니다.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에볼리는 자신의 착각에 분노하고 왕에게 그 사실을 밀고하지요.

사실을 알게 된 필리포 2세가 흐느끼는 듯한 첼로가 연주되는 서재에 혼자 앉아 있습니다. 왕은 양초가 다 타들어 가는 새벽까지 잠들지 못합니다. 왕비가 처음 시집올 때 흰 머리 가득한 자신을 보고 한숨짓던 모습과 어릴 적 엄마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부왕인 카를 5세의 엄격한 왕자 수업을 견뎌 내야 했던 기억까지 떠오릅니다. 그는 고독한 권력자였던 거지요. 바위 절벽 위에 선 늑대의 울음처럼, 아리아 ‘그녀는 날 사랑한 적이 없다’를 신음처럼 토해내고 있습니다.

국왕의 처절한 이 아리아는 어린 공주를 취한 왕에게는 숙명이기도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영화 '은교'에서 제자 서지우에게 은교를 빼앗기고 분노의 복수를 꿈꾸는 이적요가 오버랩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왕자에게 반역죄 혐의가 씌어진 상황에서 로드리고는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죽습니다. 왕자에게 일단 플랑드르를 다스리며 후일을 도모하라는 로드리고의 비책을 전해주려 엘리자베타가 돈 카를로를 수도원에서 은밀히 만납니다. 그녀는 퐁펜블로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던 하룻밤의 짧은 추억을 떠올리면서, 그를 더 큰 세상으로 떠나 보내려 합니다. 그런 그들 앞에 필리포 2세가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고 왕자는 처형되고 맙니다.

사랑이 뭐길래…. 한 여인을 두고 벌이는 사랑과 질투, 아들은 사랑한 죄밖에 없건만. 연인이 어미가 되는 이런 비극이 더는 없어야겠지요.

오페라해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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