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차관보, "한국도 북한을 조이는 추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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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차관보는 20일(현지시간) 미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미국은 북한의 정권 교체(regime change)이 아닌 북한 정권의 행태 변화(a change in this regime's behavior)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정권을 바꿔야 한다는 견해를 어떻게 보느냐'는 리처드 루가 외교위원장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북한 체제는 우리가 아닌 북한 주민이 결정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은 북한을 더 압박해야 할 때"라며 "한국.중국.일본을 포함한 다자적(多者的) 대북 경제 압박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를 실어나르는 북한 선박.항공기를 수색.봉쇄하는) 확산방지구상(PSI) 활동도 강화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청문회 후 기자들에게 "미국은 다음주 말레이시아에서 열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에 북한이 참석할 경우 북한에 비공식 6자회담을 열자는 입장을 전달하되, 북한이 회담을 거부하면 북한을 뺀 5자회담을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국도 북한을 조이는 추세"=힐 차관보는 "북한에 많은 인내심을 보이는 접근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며 대북 압박 강화론을 전개했다. "북한이 유엔 결의에 응하지 않으면 우리는 파트너들과 함께 추가 경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과의 거래가 미미한 미국 혼자서 할 수는 없고, 모든 파트너가 공조해야 한다"며"특히 북한과 활발한 무역관계를 맺고 있고 대북 지렛대가 큰 중국과 협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이 대북 관계를 그대로 우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요구하는 북한의 변화를 중국이 강요할(compel)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일본도 몇가지 조치를 검토 중"이라고 한 그는 한국의 경우 비료 등 인도적 물품의 대북 지원을 중단했음을 언급하며 "한국도 북한을 조이는(tighten up) 추세"라고 설명했다. 이런 발언들로 미뤄볼 때 ARF에서 5자회담이 열리면 미국은 대북 추가 압박 문제를 주요 의제로 내세울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9.19 공동성명 이행과 관련해 북한에 줄 혜택을 논의해야 한다는 한국의 입장과는 아주 다르다는 얘기다.

◇"핵실험하면 엄중하게 다룰 것"=힐 차관보는 '북한이 넘어서는 안될 금지선(red line)이 있느냐'는 러셀 파인골드 의원의 물음에 "물론"이라며 "북한이 핵실험을 한다면 극도의 엄중함으로 문제를 다룰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김정일의 다음 행동을 추측하는 건 위험하지만 그가 뭘 또 과시하길 원한다는 점에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다"며 "김정일이 그런 종류의 행동을 하면 할수록 북한 체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선의의 저수지(reservoir of goodwill)'는 빠른 속도로 말라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대북 정책 둘러싼 토론 흥미롭다"=힐 차관보는 "한국에서 햇볕정책을 유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대북 지원에) 상응하는 대가들(quid pro quos)을 더 요구해야 하느냐는 걸 놓고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는 현상은 매우 흥미롭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한국 정부에 우리 입장을 전달할 필요가 있지만 바람직한 건 한국인이 공통의 분석에 기초해 스스로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라며 "우리가 한국인들에게 뭘 하라고 말하는 건 효과도 없을 뿐 아니라, 한.미 관계를 해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 미사일 과소평가 금물"=힐 차관보는 "북한은 미사일 발사로 군사적 무용(武勇)을 과시하면 우리가 더 많은 걱정을 할 것이고, 더 많은 양보를 할 것으로 믿는 것 같으나 그건 착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북한의 미사일 기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스커드 미사일은 한국의 모든 지역을, 노동 미사일은 일본을 칠 수 있는 만큼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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