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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갯모·떡살무늬·모란꽃…서양옷에 우리 것을 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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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형형색색' 아카이브 전시를 연 패션 디자이너 설윤형씨(왼쪽)와 전시를 기획한 아트 디렉터 서영희씨가 14일 오후 서울 동대문 DDP 전시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형형색색' 아카이브 전시를 연 패션 디자이너 설윤형씨(왼쪽)와 전시를 기획한 아트 디렉터 서영희씨가 14일 오후 서울 동대문 DDP 전시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오늘부터 11월 7일까지 서울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 배움터 둘레길에서 패션 디자이너 설윤형(75)씨의 전시회가 열린다. ‘2020 봄·여름 서울패션위크’ 오프닝 행사로 준비된 명예디자이너 아카이브 전시로 제목은 ‘형형색색((形形色色)’이다.

설윤형 디자이너의 '형형색색' 전시 #단청·조각보에서 우리 색과 문양 찾아 #'일월오봉도' 품은 서양 드레스도

이번 전시를 기획하고 구성한 아트디렉터 서영희(58)씨는 “전시 구상을 위해 선생님의 옷을 모두 펼쳐놓고 보니 가지각색 빛의 향연이 펼쳐졌다”며 “형형색색이라는 단어 외에는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고 했다.

탐스러운 모란꽃을 좋아하는 설윤형 디자이너는 뷔스티에, 베스트, 팔 토시 등의 서양 의상에 전통적인 모란 자수를 수놓은 의상들을 많이 만들었다. 김경록 기자

탐스러운 모란꽃을 좋아하는 설윤형 디자이너는 뷔스티에, 베스트, 팔 토시 등의 서양 의상에 전통적인 모란 자수를 수놓은 의상들을 많이 만들었다. 김경록 기자

1975년 ‘설윤형 부티크’를 시작한 설씨는 서양 복식에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낸 대표적인 디자이너다. 원피스·드레스·뷔스티에 같은 서양 의상에 모란꽃·떡살무늬 자수를 놓고, 베겟모·조각보를 잇는 등 가장 한국적인 색채와 문양으로 패션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해냈다. 각양각색의 비단은 물론이고 모시·닥종이 등 전통 소재를 이용해 매 시즌 다양한 옷을 만든 것도 설씨였다.
서영희씨는 “90년대 선생님의 쇼를 보기 위해 매번 어렵게 티켓을 구해 쇼 장을 찾았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모든 옷이 다 아름다웠지만 늘 기대가 됐던 건 쇼 맨 마지막에 나오는 피날레 의상이었다”고 기억했다.

설윤형씨는 쇼를 열 때마다 맨 마지막 등장하는 의상에는 우리 전통문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1996-97년 FW 쇼 피날레 의상으로 등장했던 '일월오봉도' 드레스. [사진 설윤형 형형색색 전시 도록]

설윤형씨는 쇼를 열 때마다 맨 마지막 등장하는 의상에는 우리 전통문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1996-97년 FW 쇼 피날레 의상으로 등장했던 '일월오봉도' 드레스. [사진 설윤형 형형색색 전시 도록]

설씨의 쇼 마지막에는 늘 우리 전통문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디자인이 등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97년도 만들었던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드레스’다. 서씨는 “조선시대 궁궐 정전의 어좌 뒤편에서 국왕의 권위를 상징했던 ‘일월오봉도’를 여성의 드레스 자락에 펼쳐놓을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고 했다. 이 일월오봉도 드레스는 올드 스타 잉그리드 버그만의 딸이자 배우인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90년대 말 보그 표지 옷으로 입고 등장한 바 있다. 서씨는 2015년 한불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파리장식미술관에서 열렸던 ‘코리아 나우(Korea Now)’ 전시를 큐레이팅하면서 설씨의 일월오봉도 드레스를 전시장 한가운데 배치했었다.
설씨는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것이 한복·단청·한국화 등이었으니 그 기억이 의상에 반영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누군가는 우리 것을 현대적인 감각과 엮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고 한다.
전남 순천이 고향인 설씨는 어려서부터 옷 만들기를 좋아했다. 매일 저녁 친구 어머니가 하는 한복집으로 달려가 버려지는 자투리 비단 조각들을 주워다 컬러와 모양을 이리저리 맞춰보며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설씨는 “우리 어머니가 옷을 참 좋아하셨다”며 “돈도 없으면서 때마다 철마다 고운 새 한복을 맞춰 입는 엄마를 어린 마음에는 참 사치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옷을 보는 그 눈을 내가 물려받은 것 같다”며 웃었다.

설윤형씨는 삼각, 사각, 육각형의 베갯모를 이어 붙여 조형적인 미를 갖춘 의상을 만들어냈다. [사진 설윤형 형형색색 전시 도록]

설윤형씨는 삼각, 사각, 육각형의 베갯모를 이어 붙여 조형적인 미를 갖춘 의상을 만들어냈다. [사진 설윤형 형형색색 전시 도록]

미국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일하며 국제복장학원에 다닐 때는 남대문·동대문에 있던 구호물자 시장에서 옷을 사다가 모두 뜯어 하룻밤 만에 뚝딱 새 옷을 만들어 내곤 했다. 맘에 드는 예쁜 천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이 옷 저 옷을 사다 새 옷감을 직접 만들어낸 것이다. 이렇게 만든 옷을 입고 친구들과 명동거리 걷기를 좋아했던 그는 단연 튀었고, 덕분에 남편과의 인연도 만났다. 설씨의 남편은 무교동 음악다방 ‘쎄씨봉’의 사장이었던 이선권(81)씨다. 부친에게 쎄씨봉을 물려받은 이씨는 당시 숙식을 제공하며 가수들을 발굴했고, 조영남·송창식·윤형주·김세환 등으로 이뤄진 ‘세씨봉 친구’들과 함께 명동문화를 이끌었다.
“음악 홀 같은 데는 정말 관심이 없었어요. 우연히 친구를 따라 처음 쎄씨봉에 들렀는데 마침 이백천씨가 사회를 보는 게임 행사에서 내가 1등을 한 거예요. 부끄러움이 많아서 무대 위에서 1등을 부르는데 안 올라갔죠. 보다 못한 이선권씨가 직접 상품을 갖고 테이블까지 왔는데도 거절하고 도망쳤어요. 옷은 누구보다 튀게 입은 아가씨가 행동은 너무 순진해서 호기심이 생겼대요. 친구에게 연락처를 물어 기어코 나를 찾아왔더라고요. 이 아가씨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나.”(웃음)

"아름다운 조각보가 단순한 보자기로만 기억되는 게 싫었다"는 설윤형씨는 커다란 조각보 스카프를 만들어 수영복 위에 걸칠 수 있는 비치웨어를 만들었다. [사진 설윤형 형형색색 전시 도록]

"아름다운 조각보가 단순한 보자기로만 기억되는 게 싫었다"는 설윤형씨는 커다란 조각보 스카프를 만들어 수영복 위에 걸칠 수 있는 비치웨어를 만들었다. [사진 설윤형 형형색색 전시 도록]

설씨의 가족은 모두 아티스트다. 둘째 딸 이주영씨는 브랜드 ‘레쥬렉션’을 이끄는 패션 디자이너이고, 그의 남편이자 설씨의 사위는 ‘시나위’ 출신의 가수 김바다씨다. 이번 전시에서 딸은 엄마를 도와 의상을 준비하고, 사위는 전시장에서 상영될 영상 음악을 맡았다. 전시장을 채운 의상은 총 54벌. 하지만 45년 간 설씨가 창조해낸 패턴은 수백 개다. 영상은 전시장에서 볼 수 없는 각양각색 패턴들을 보여주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설윤형 디자이너가 제작한 '일월오봉도' 드레스. 주름을 잡는 형태에 따라 드레스에 프린트한 폭포와 나무, 바위들이 살아움직이는 듯 신비한 풍경을 펼쳐낸다. [사진 설윤형 형형색색 전시 도록]

설윤형 디자이너가 제작한 '일월오봉도' 드레스. 주름을 잡는 형태에 따라 드레스에 프린트한 폭포와 나무, 바위들이 살아움직이는 듯 신비한 풍경을 펼쳐낸다. [사진 설윤형 형형색색 전시 도록]

전시장은 ‘꿈꾸다’ ‘수놓다’ ‘잇다’ ‘그리다’ ‘엮다’ ‘누리다’ 6개의 섹션으로 구성됐다. 설씨가 평생 동안 사랑했던 디자인 모티프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구성이다. ‘꿈꾸다’ 섹션에선 사각·오각·육각·원형 베갯모를 이어 붙인 옷들이 한 편의 판타지처럼 매혹적인 자태를 선보인다. ‘수놓다’ 섹션에선 ‘부귀영화의 꽃’ 모란이 한 땀 한 땀 정성스러운 자수 바늘땀을 통해 탐스럽게 피어났다. ‘잇다’ 섹션에선 색동 조각보가 화려하다. 설씨는 “아름다운 조각보가 보자기로만 남는 게 싫어 옷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다’ 섹션에선 매·란·국·죽 문인화와 달리 자유롭고 창의력이 넘쳤던 민화들을 품은 옷들이 전시됐다. ‘엮다’ 섹션에선 색색의 와이어를 비롯해 양단·닥종이·레이스 등 다양한 소재를 엮어 어울림의 미학을 표현했던 설씨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볼 수 있다. ‘누리다’ 섹션에선 설윤형 아카이브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일월오봉도 드레스가 기품 넘치는 자태를 드러낸다. 설씨는 “왕의 장수와 축복을 기원했던 마음을 쇼를 찾은 관객들에게도 선물하고 싶어 만든 옷”이라고 했다.

설윤형 '형형색색' 전 '잇다' 섹션에 전시된 조각보 의상. [사진 설윤형 형형색색 전시 도록]

설윤형 '형형색색' 전 '잇다' 섹션에 전시된 조각보 의상. [사진 설윤형 형형색색 전시 도록]

설윤형 '형형색색' 전 '그리다' 섹션에 전시된 의상. 형식과 표현이 자유로운 민화를 드레스에 담았다. [사진 설윤형 형형색색 전시 도록]

설윤형 '형형색색' 전 '그리다' 섹션에 전시된 의상. 형식과 표현이 자유로운 민화를 드레스에 담았다. [사진 설윤형 형형색색 전시 도록]

'형형색색' 아카이브 전시를 기획, 구성한 서영희 아트 디렉터. 진태옥, 한혜자, 루비나에 이어 설윤형까지 네 명의 명예 디자이너 아카이브 전시가 그의 손을 거쳐 아름답게 펼쳐졌다. 김경록 기자

'형형색색' 아카이브 전시를 기획, 구성한 서영희 아트 디렉터. 진태옥, 한혜자, 루비나에 이어 설윤형까지 네 명의 명예 디자이너 아카이브 전시가 그의 손을 거쳐 아름답게 펼쳐졌다. 김경록 기자

전시를 준비하면서 느낀 소회를 물으니 설씨는 “창고 속에 묻어뒀던 옷들을 끄집어내고 보니 지난 시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며 “전시를 보러 온 누군가의 어린 시절 단청·떡살무늬·모란꽃에 스민 좋은 기억과 그리움이 살아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진태옥·한혜자·루비나에 이어 설윤형까지, 네 번이나 명예 디자이너 아카이브 전시를 담당한 서영희 아트 디렉터는 “우리 패션사에도 이렇게 훌륭한 디자이너와 옷들이 많은데 젊은 층은 그걸 미처 모르고 있다”며 “이번 기회에 우리 패션문화의 단단한 뿌리를 찾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또 “원로 디자이너들의 멋진 마스터 피스들을 잘 보관하고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글=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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