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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한국계 나상욱과 재미교포 케빈 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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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나상욱이 17일 제주에서 개막하는 CJ컵에 참가한다. 우승 후보 중 하나다. [AP=연합뉴스]

나상욱이 17일 제주에서 개막하는 CJ컵에 참가한다. 우승 후보 중 하나다. [AP=연합뉴스]

2005년 PGA투어 투산 오픈. 당시 22살의 투어 2년 차 신예 선수 케빈 나는 제프 오길비 등과 연장전을 벌였다. 두 번째 연장에서 케빈 나는 핀 1.5m 옆에 공을 붙여 승기를 잡았다.

최근 30경기 3승, 세계 24위 올라 #10년 이상 이어진 악몽 빠져나와 #“뼛속까지 한국인 외면 땐 갈데 없어” #한국팬 사랑받기 위해 싸움에 주목

그러나 오길비가 불가능할 것 같은 내리막 8m 퍼트를 넣었다. 케빈 나는 당황했고, 짧은 퍼트를 넣지 못해 패했다. 악몽같은 상황을 겪은 이후 그는 진짜 식은 땀 나는 꿈을 꾸면서 살게 됐다. 미국 골프닷컴 인터뷰에서 그는 “오랫동안 마지막 홀에서 공을 물에 빠뜨리거나 퍼트를 놓치는 꿈을 꾸다 깨어났다”고 고백했다.

현실에서 성적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치 자신의 악몽처럼, 우승 앞에선 뒷걸음질 쳤다. 시간은 흐르는데 우승컵이 없어 압박감은 점점 쌓였다.

2011년 스윙 교정 중 참가한 텍사스 오픈에선 한 홀에서만 16타를 치기도 했다. 티샷이 언플레이어블이 돼서, 다시 티박스로 돌아와 티샷을 치고 또 문제가 생겨 잠정구를 칠 때 캐디가 실수로 공을 떨어뜨렸다. 이 공을 뒷 조의 앙헬 카브레라가 발로 찼다.

케빈 나가 시간을 끄니 짜증 났을 것이다. 케빈 나는 숲 속이라 공을 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다시 티박스로 돌아가기 싫어 끝까지 쳤고, 16타라는 숫자가 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포기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관중과 미디어의 박수를 받았다. 6개월 후 케빈 나는 첫 우승을 했다.

전화위복은 잠시뿐이었다. 이듬해 두려움 때문에 백스윙이 안 되는 증상이 생겼다. 슬로플레이, 너무 많은 웨글, 스윙 중 자신감을 잃어 일부러 헛스윙하는 행동이 나왔다.

2012년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는 우승 경쟁 중 스스로에게 “방아쇠를 당겨”라고 소리 지르기도 했다. 도저히 백스윙할 수가 없어서였다.

관중들은 “나나나나나나, 헤이, 헤이, 헤이, 굿바이”라고 합창하며 조롱했다. 골프닷컴 기사에 의하면 케빈 나는 캐디에게도 당했다. 2014년 한 대회에서 아담 스콧의 가방을 메던 전 타이거 우즈의 캐디 스티브 윌리엄스는 경기 후 악수를 거부하면서 “너와 함께 경기하는 건 나쁜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10년 넘게 따라 다닌 악몽을 케빈 나는 극복했다. 그는 자신이 참가한 최근 30경기에서 3승을 거뒀다. 세계 24위다. 요즘 가장 뜨거운 선수 중 한 명이며, 17일 개막하는 CJ컵에서도 우승후보 중 한 명이다. 케빈은 공포와 싸워 이겼다.

그는 또 다른 투쟁을 하고 있다. 케빈 나이자 나상욱인 한 개인의 투쟁이다. 5년 전 한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뼛속까지 한국인이다. 미국에서는 날 미국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나를 미국인 취급하면 난 갈 데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그를 향한 시선은 곱지 않다. 2014년 시끄럽게 파혼을 겪었다. 송사가 끝났지만 이 사건이 최근 다시 불거져 부인과 함께 출연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중도하차했다.

케빈 나는 7일 PGA투어 우승 후 미국 방송 인터뷰 도중 한국말로 “허위 사실에도 (불구하고), 믿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하다. 어금니 깨물고 이 갈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허위 사실’이라는 그의 말이 사실인지 기자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기자의 판단 영역도 아니다.

흥미로운 점은 있다. 케빈 나는 미국에서 성공했다. 수백억원을 벌었다. 올 때마다 잡음이 생기니 한국과 담을 쌓고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터다.

그러나 그는 미국 방송 우승 인터뷰 도중 한국어로 얘기했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에 정착한 이민자가 생방송 인터뷰 중 고국에 있는 팬들에게 할 얘기가 있다고 다른 언어를 1분간 썼다면 어땠을까. 케빈 나는 그걸 두 번 했다. 그는 집요하게 한국 팬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

그는 5년 전 “내가 성적이 좋을 때는 ‘한국계 나상욱’이 되고, 성적이 안 좋을 때는 ‘재미교포 케빈 나’가 되는 게 현실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어금니 깨물고' 우승을 한 건 나상욱과 케빈 나라는 자신의 이름을 건 정체성 투쟁인지도 모르겠다.

성호준 골프팀장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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