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송인한의 퍼스펙티브

가습기 살균제 사망 1449명…제대로 된 진상조사도 없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정재홍 기자 중앙일보 부데스크

안전하게 살 만한 세상 

지난 8월 28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참사 진상 규명 청문회’에 출석해 가습기 살균제 개발 경위와 원료 선정 경위 등을 설명하는 기업 분야 증인들. [뉴스1]

지난 8월 28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참사 진상 규명 청문회’에 출석해 가습기 살균제 개발 경위와 원료 선정 경위 등을 설명하는 기업 분야 증인들. [뉴스1]

"보시다시피 이 사람은 지금 인공호흡기와 밑에 있는 산소통과 또 여기를 통해서 석션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폐가) 13% 정도 남아있습니다." "애경 용기에 인체에 해가 없는 안전한 제품이라고 표기를 왜 했습니까. 애경을 믿고 샀는데 막내가 죽었습니다." (지난 8월 가습기 살균제 진상 규명 청문회에서 피해자 가족 증언)

가습기 살균제 재난은 현재진행형 #시간 지체될수록 피해자 고통 커져 #구체적·현실적·즉각적 해법 절실 #안심하고 사는 사회안심망 필요

"저는 만 한 살 때 폐가 터졌습니다. 저는 또래 친구들이 당연히 누리는 것을 누리지 못합니다. 이렇게 제 인생의 걸림돌이 되는 가습기 살균제는 욕심 많은 기업에서 판매했고, 정부에서 인체 독성물질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허가해서 우리가 쓰게 됐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누구라도 책임을 지길 바랍니다.” (SBS 영재발굴단 9월 25일 방송,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박준석 군)

단일 사건으로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사망 피해자가 생긴 가습기 살균제 재난의 진상 규명을 위한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가 지난 8월 27~28일 열렸다. 오래된, 그래서 이미 해결되지 않았나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해결은커녕 진상 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상태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일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국이다. 1994년 세계 최초를 표방하며 시장에 나온 가습기 살균제가 17년 동안 1000만 병 가까이 팔리기까지 환경부를 비롯한 정부는 어떤 조치도 내리지 않았고 2011년에서야 질병관리본부가 가습기 살균제와 폐 손상 사이의 인과관계를 최초로 알리며 제품 사용 중지를 권고했다.

회복·치유 보상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그 이후 8년이 지난 지금 피해자들의 회복과 치유를 위한 피해 보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공청회 당일까지 1431명의 사망자가 보고 되었으나 한 달 보름 정도 지난 13일 기준 사망자는 1449명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다. 원인을 모르는 채 폐렴으로 사망한 사람 중에도 피해자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 규모는 더 심각할 수 있다. 이미 오래전에 해결되어 과거형이 돼야 했던 사태였으나, 현재진행형, 아니 조속히 해결하지 않는다면 미래형으로 이어질 재난이다.

피해자는 폐 질환 뿐 아니라 다양한 질환을 호소하고 있으며, 심리적 고통 역시 말할 수 없이 심각하다. 한국역학회(연구책임자 한림의대 김동현 교수)가 심층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66%가 만성적 울분 상태를, 절반 이상이 우울·죄책감·불안을 보고 했다. 자살 생각과 자살 시도 역시 일반 인구보다 훨씬 높은 27.6%와 11%로 조사되었다.

치료 비용과 경제 활동 손상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 역시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누적되는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벼랑 끝으로 몰리는 피해 가정이 늘고 있다. 피해자 판정 기준에 대해서 납득할 수 없는 피해자가 많고 그에 따라 배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안전을 위한 제도도 개선되지 않았다. 약 50만명이 살균제에 노출되었다고 추산되나 군대와 학교에서의 사용이 최근 추가로 밝혀짐에 따라 피해자가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전염병에 속수무책이던 중세시대도 아니고 전시(戰時)도 아닌 이 시대에, 우주로는 인류가 쏘아올린 비행체가 태양계 바깥으로 날아가고 있고, 미시적으로는 인간의 유전자 지도가 완성되어 생명의 원초적 비밀에 접근하는 이 시대에, 우리의 일상에서 생활용품에 의해 13일 현재까지 6578명의 피해자가 발생하고 그중 1449명이 사망하였으며 이 숫자가 계속 늘어날 것이라는 것이.

1994년 굴지의 대기업이 세계 최초로 가습기를 건강하게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었다고 선전했으며, 유명 방송인이 광고에서 가습기 살균제가 환경을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고 마치 제품을 사용해야 똑똑한 소비자라는 듯한 메시지("아내가 똑똑하면 편안하니까"라는 광고 문구를 기억한다)를 던졌다. 제품이 인체에 무해하다고 선명히 표기돼 있었고, 정부는 KC(국가 통합 인증) 마크도 붙여줬으니 피해자들은 당연히 믿고 가족의 건강을 위해 열심히 사용했다. 게다가 기침을 하고 열이 나니 더 열심히 가습기 살균제를 넣었는데, 그것이 참사를 가져온 재난의 원인 물질이었다니. 이 재난의 가장 가슴 아픈 비극은, 남아있는 생존 가족에게 살균제를 사용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게 한데 있다. 피해자가 죄책감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계속되는 유해물질 재난

이 큰 재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생활용품 독성물질로 인한 문제가 나오고 있다. 최근 몇 년만 보더라도 살충제 계란, 유해물질 생리대, 라돈 침대가 물의를 빚었고, 최근 중국에서 만든 고혈압약 원료에 발암가능 물질(발사르탄)이 들어있었고 불과 며칠전에도 발암물질(라니티딘)이 들어있는 위장약이 판매 중단되는 등 문제가 이어지고 있다.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소비자가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일일이 화학 성분을 확인하고 위험성을 직접 알아봐야 하는가? 문제가 발생하고 나서도 제품 리콜이 이뤄지는 것으로 끝나며, 정부는 뒷짐을 지고 피해자가 가해 기업과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한단 말인가? 결국 시민 불매운동으로 이어져 시민들이 직접 안전을 책임지는 수 밖에 없단 말인가?

정부·기업의 책임 떠넘기기 심각

지난 8월 ‘가습기 살균제 참사 진상 규명 청문회’에서 발언하는 피해자와 가족. [연합뉴스]

지난 8월 ‘가습기 살균제 참사 진상 규명 청문회’에서 발언하는 피해자와 가족. [연합뉴스]

이 사건을 둘러싸고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가 없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피해자가 존재하는데 가해자가 없을 때는 모두가 책임을 회피하고 떠넘기고 있을 뿐 모두가 공범일 때가 있다. 제조하고 판매한 기업의 책임은 말할 필요조차 없고, 위험물질 관리와 소비자 보호를 위한 법과 제도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한 정부, 특히 유해물질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환경부, 제품 허가를 내준 산업통상자원부, 바이러스성 질환으로 판단하고 역학 조사에 늦은 보건복지부, 피해자 구제 예산을 삭감한 기획재정부 모두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비단 정부뿐일까, 연구 수행의 부정행위 논란이 있던 학계, 진실을 끝까지 밝히지 못한 언론, 사이다 발언으로 순간 주목받고 곧 잊어버리는 정치인 등 모두가 공범인지 모른다.

1994년 시작된 가습기 살균제 비극의 역사에서 김영삼 정부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파를 떠나 그 어떤 정부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번 정부 들어 최초로 정부 책임에 대해 사과하고 대통령이 피해자 가족을 만나 과거에 비해 의견을 수렴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구체적인 방안이 진척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체감하는 피해자가 많다.

특히 최근 경제를 위해 안전을 희생할 수 있다는 듯한 정부의 태도가 우려스럽다. 화학물질의 평가 및 등록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 관리법(화관법)은 2015년부터 시행 중이나 산업계의 반발이 지속되어 왔다. 기업들은 소재·부품 산업 육성을 위해 화평법과 화관법이 대폭 완화돼야 한다고 성토했고 정부는 일본의 경제 보복 이후 대안으로 환경·산업안전보건에 관한 인허가 기간 단축 등을 제시했다. 경제를 위해 안전을 희생하려는 프레임은 대단히 위험하며, 안전을 기본적으로 지키면서 경제를 살리기 위한 방안을 정부는 제시해야 한다.

피해자 관점에서 지원해야

왜 일어났는가에 대한 질문(why)은 문제의 이해와 성찰에 중요하나 끝없이 why에 머무르다 보면 전진하지 못한다. 현실을 고려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결하고 나아갈 것인가(how)의 관점으로 넘어가야 한다. 오랜 시간 해결되지 않음에 따라 피해자의 고통이 커지는 지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실행해야 한다. 피해자가 신속히 치료받고 가족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피해자 관점에서 지원해야 한다.

첫째, 피해자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되었던 것은 제대로 된 사과와 책임 규명이 없이 기업과 정부가 책임을 회피했던 데 있다. 이해 관계자가 직접 만나 대화하는 장을 만드는 것이 문제의 이해와 갈등 해결의 출발점이다.

둘째, 피해자가 경험하는 의료적, 심리적, 사회경제적, 법률적 문제를 한 번에 정부가 지원할 수 있는 포괄적 피해 지원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각각의 문제에 대해 피해자가 직접 접근하기 힘들다. 정보와 자원의 불균형으로 인해 피해자가 기업에 직접 치료비를 청구하고 배상금을 협상하는 것은 한 개인으로서 어려운 일이다. 아울러 피해자의 치료 및 문제 해결에 대해 책임성을 가지고 적극적인 팔로우업을 해야 한다. 이번 청문회에서도 피해 관련 데이터 관리의 부실함과 불투명한 정보 공유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셋째, 정부 부처 간 협력 체계가 정비되어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와 관련된 여러 부처, 즉 환경부뿐 아니라 기획재정부·산업통상부·보건복지부·국민건강보험공단·식품의약품안전처 등 관련 부처의 협력이 필요하다. 과거 부처 간 조정의 어려움을 생각할 때, 대통령 혹은 국무총리 직속의 조직이 각 부처 간 조율을 가능케 할 것이다.

정부는 국민 보호 옹호자 역할 해야  

넷째, 정부는 2013년부터 폐 질환 판정 기준을 4단계로 만들어 배상과 지원 자격을 나눠 1, 2단계만 공식 피해자로 인정하여 장례비 및 의료비를 지원하고 있다. 제외된 억울한 피해자가 없도록 엄정하고 객관적인 판정을 하고 기업의 배상을 유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 지속가능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특별법을 급조해 일관성 없이 접근해서는 안 된다. 계속 바뀌는 제도와 기준으로 인한 피해는 결국 피해자에게 돌아가게 된다. 또한 국가가 제도적으로 책임져야 할 사안마다 국민이 불매 운동을 하게 미뤄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 사회는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복잡한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다. 새로 등장하는 유해물질에 의한 피해가 그중의 하나이다.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민이 안전하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거나 중간에서 심판자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보호를 위한 적극적 옹호자가 되어야 한다.

선진 사회는 경제적 부의 성취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국민이 안전한 환경에서 기본적 권리를 충족시키며 자아를 발전시키는 사회가 선진사회다. 안전 없이 선진국은 없으며 안전의 수준이 국격이다. 경제적인 사회안전망뿐 아니라 환경과 건강의 위협으로부터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촘촘한 사회안심망(安心網)을 제공하는 것이 새 시대에 맞는 국가의 존재 이유다.

연세대 사회복지학 교수·하버드대 보건대학원 객원과학자·리셋 코리아 보건복지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