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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논 미꾸라지탕같이 걸쭉, 35년 요리 내공 제대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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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6호 24면

이택희의 맛따라기

가을 들녘에는 추수가 한창이다. 누런 벼 이삭이 고개 숙인 들녘을 보면 햅쌀밥 뜸 드는 구수한 향보다 추어탕이 먼저 생각난다. 반세기 전 추억 때문이다. 벼가 익으면 농부는 논에서 물을 뺀다. 콤바인이 아니라 낫으로 포기를 일일이 베던 시절에는 벼에서 수분이 빠져야 가벼워져 거두기가 수월했고 이삭도 잘 여물었다. 벼 알갱이에 수분이 적어야 보관 중 변질도 덜 된다. 물을 빼려고 논 둘레에 작은 물길을 내는 걸 ‘갈개 친다’고 한다(‘도구 친다’는 경상도 사투리). 갯벌 같은 논흙을 손으로 긁고 벼 포기를 뽑아 옮기면서 골을 낸다. 그때 흙 속에 있던 미꾸라지가 손에 걸리기도 하고 손가락 틈으로 삐져나오기도 한다. 미꾸라지는 논바닥 물이 빠지는 방향으로 따라가 갈개에 모이고 땅속으로 들어가 겨울잠 잘 자리를 잡는다. 벼를 베고 살얼음이 얼기 시작할 무렵 삽으로 갈개 흙을 파면 동면에 들어가 움직임이 둔한 미꾸라지들이 달아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꿈틀댄다.

시흥 ‘일경추어탕’ 최경숙씨 #서민 음식 하라는 아버지 뜻에 따라 #체내 독소 푸는 데 좋은 추어탕 도전 #좋은 재료 듬뿍 써 이문은 박하지만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는 게 중요

한식당 운영하던 ‘방배동 최 선생’

최경숙씨가 추어탕용 된장을 담고 있다.

최경숙씨가 추어탕용 된장을 담고 있다.

이렇게 잡은 미꾸라지는 겨울잠에 대비해 비축한 기름기로 몸통이 누렇고 살이 통통하게 올라 영양도, 맛도 절정이다. 동물 단백질이 귀하던 농경시대 농부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영양식이었다. 어릴 적 가을이면 그런 추어탕을 먹었다.

그 시절 미꾸라지로 해 먹던 음식은 추어탕이 전부다. 미꾸라지에 된장(막장) 풀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채소들을 부재료로 넣고 끓여 먹던 음식이다. 요즘에는 숙회·튀김·만두 등 여러 가지로 조리하지만, 최근 30~40년 안에 개발된 음식이다. 농약을 치는 않는 논이 드문 요즘에는 가을 논 미꾸라지탕의 맛은 추억으로만 남았다. 그런데도 가을이면 발걸음은 추어탕 집으로 향한다.

일반적인 추어탕,

일반적인 추어탕,

의외로 외진 곳에서 뜻밖의 사람이 끓이는 새로운 추어탕을 만났다. 경기도 시흥시 과림저수지 근처에 있는 ‘일경추어탕’이다. 추어탕은 일반(9000원)·특·통·죽순·더덕(각 1만1000원)·고기(1만3000원) 등 6가지가 있다. 끓이는 주인공은 1984년부터 ‘방배동 최 선생’ ‘명문가 요리선생’으로 시대를 풍미한 최경숙(68)씨다. 하도 뜻밖이어서 칭찬보다는 ‘웬 추어탕이냐’는 질문이 먼저 나왔다. 그는 1996년부터 10년 넘게 청담동에서 ‘멜리데’라는, 프랑스풍이 가미된 한식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당시 앞서가던 고급 음식점이라 유명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싫어했다. “사람들 덕에 유명해졌는데, 사람들에게 베풀고 도움이 되는 음식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비싸고 좋은 음식은 너 말고도 할 사람 많다”고 화도 냈다. 그러면서 “요즘 기업에서 책정한 직장인 점심값이 4000~6000원이다. 잘 주면 8000원이다. 그 돈으로 먹을 수 있는 서민 음식을 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전기건설업 면허 국내 1호 사업자다.

죽순을 얇게 썰어 넣은 죽순추어탕.

죽순을 얇게 썰어 넣은 죽순추어탕.

서민 음식으로 뭐가 좋을지 고민하다가 대학원 최고위 과정을 함께 수강한 노무현 대통령 한방주치의 신현대(72) 박사에게 상의했다. “한의사로서 추천하자면 추어탕이다. 외식을 많이 하는 현대인은 몸 안에 음식 독소가 쌓이는데, 그걸 푸는 데 미꾸라지가 도움된다. 좋은 우거지를 넣으면 더 좋다”고 권했다. 다니는 교회 목사님도 “정말 좋은 음식”이라며 힘을 보탰다.

미꾸라지를 만져본 적도 없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추어탕을 먹어보고 연구했다. 추어탕은 지역별로 다섯 갈래가 있다. 서울·강원도(원주)·충청도(금산)·전라도(남원)·경상도(대구·청도)식이다.

소갈비가 들어간 고기추어탕.

소갈비가 들어간 고기추어탕.

서울식은 미꾸라지를 삶아 통으로 넣고, 이름도 추탕이라 달리 불렀다. 곱창이나 사골·양지 국물에 고기·두부·버섯·유부·마늘 등을 넣고 끓이다가 고춧가루 풀고 미꾸라지 넣어 얼큰하게 끓인다. 강원도식은 삶아서 간 미꾸라지와 고추장·고춧가루를 작은 솥에 넣고 식탁에서 즉석에서 끓이다가 미나리·감자·표고버섯·파 등을 넣는다. 마지막에 다진 마늘과 부추를 넣어 한소끔 더 끓인다. 충청도식은 미꾸라지를 푹 고아 체에 거른 국물에 고추장·된장을 풀고 무시래기·부추·깻잎·애호박 등을 넣고 끓이면서 고춧가루로 마무리한다. 전라도식은 미꾸라지를 삶아 으깨고 들깨즙과 된장을 넣어 걸쭉하게 끓인다. 열무 시래기, 고구마 줄기, 고사리 등을 넣기도 한다. 경상도식은 미꾸라지를 삶아 으깨고 여린 배추나 무청을 넣어 무르도록 끓인다. 마지막에 다진 청·홍고추를 넣는다. 전국 추어탕 중 국물이 가장 맑고 담백하다.

전국을 돌아보고 고른 결론은 전라도식 추어탕. 남원 방식을 기본으로 ‘요리 선생’의 내공을 더해 ‘일경추어탕’으로 재구성했다. 미꾸라지 국물에 집된장과 들깻가루, 열무 시래기를 넣고 고추장·간장으로 맛을 낸다. 탕 그릇은 나무를 태운 재로 만든 유약 발라 구운 남원 인월요업 뚝배기다. 추어탕은 밥이 맛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24종 스테인리스(27종이 100% 스테인리스) 1인용 압력밥솥으로 즉석에서 지어서 낸다. 솥 하나에 45만원짜리다.

표고버섯 우린 물이 특급 조미료

주방직원이 점심시간 전 추어탕 기본 국물을 미리 담고 있다. 신인섭 기자

주방직원이 점심시간 전 추어탕 기본 국물을 미리 담고 있다. 신인섭 기자

맛의 핵심은 현장에서 담가 익힌 장(醬)이라고 판단했다. 음식점에 장독대를 두려고 교외로 나가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시흥시 변두리까지 가게 됐다. 장사가 안돼 내놓은 추어탕 집을 인수하고, 원주 황둔에 있던 장독대를 옮겼다. 그렇게 2012년 6월에 개업해 벌써 7년을 넘겼다. 탕이 진하지만 맛은 순하다. 잡냄새 없게 삶아 뼈를 추려낸 미꾸라지 살이 곱게 간 들깨즙, 5~6년 잘 익은 된장, 구수한 무시래기와 어울려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맛을 엮어낸다. 보통은 얘기해주지 않는 조리방법 두 가지를 알려줬다. 첫째 미꾸라지 냄새 빼기. 통에 담고 맑은 물을 조금씩 흘려보내면서 사흘간 해감한 미꾸라지를 건져 3년 넘게 간수를 뺀 소금을 뿌려 표면의 점막을 제거하고 음나무·계핏가루·통후추를 넣고 삶는다. 둘째는 비밀 조미료. 우연히, 반찬 만들다 남은 걸 아까워서 넣었더니 탕 맛이 놀랍게 변했다. 그래서 필수 조미료로 등극한 표고 우린 물이다.

미꾸라지 비린내를 잡기 위해 사용하는 음나무 토막. 신인섭 기자

미꾸라지 비린내를 잡기 위해 사용하는 음나무 토막. 신인섭 기자

7년 성과를 물었다. “좋은 재료 쓰고 인건비는 올라 이문이 박하다. 남는 게 거의 없다.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는 게 중요하지, 돈이야 나중에 벌겠지. 적자 아닌 게 다행이다. 돈은 가욋일로 벌어서 쓴다”고 했다. 아버지는 탕을 먹고 “맛있다. 이 맛 변치 말고 해라. 먹으러 오는 사람들 건강을 책임진다는 생각 잊으면 안 된다”고 흡족해했다고 한다.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lee.tackhee@joins.com
전직 신문기자. 기자 시절 먹고 마시고 여행하기를 본업 다음으로 열심히 했다. 2018년 처음 무소속이 돼 자연으로 가는 자유인을 꿈꾸는 자칭 ‘자자처사(自自處士)’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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